[자현모란] 👻 음악실의 유령 🎼
Diving
2021. 8. 20. 15:45
크툴루의 부름 7판 팬 메이드 시나리오 플레이 로그
👻 음악실의 유령 🎼
수호자: 비모란
2020.12.31~ 2021.03.25
이자현 :탐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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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너와 내가 가장 바라던, 그러나 오직 너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이야기
당신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무지하여 눈치채지 못했을 뿐 실은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던 그 날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를 것 하나 없던 오전이었음이라고
그러니까……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베란다 창문 너머로, 통상 '여름 냄새'로 취급되곤 하는 오존 냄새가 조금 짙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음악실의 유령
삐이이이익……
코드를 꽂아두었던 유리 티포트의 주둥이에서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틀어두었던 뉴스의 주제가 전환된 것은 그때였습니다
당신은 티포트의 코드를 뽑으며, 혹은 이른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식탁에 앉은 채 TV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자현:아침이었다.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뭔지도 모를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멍하니 뉴스를 봤다. 아침이 아니었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뉴스였다. 오늘은 이왕 켜져 있으니 볼까. 보나마나 이라현이 틀어두고 갔겠지.
화면에는 한 달 전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속보를 따로 다루기 위해 금주중 신설 편성된 채널이 틀어져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표정은 짐짓 심각합니다
편성된 채널의 인트로격인 멘트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본격적인 보도가 시작됩니다
그러고보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문득 형제들이 옥신각신하며 TV의 볼륨을 낮춰두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이자현:뭐라는 거야. 평소같았으면 이다현을 부려먹을텐데. 아무래도 꼴을 보아하니 먼저 학교라도 간 모양이었다. 짜증나. 리모컨은 또 어디 던져놨어. 주변을 열심히 둘러봤다.
소파 팔걸이 아래 나동그라져 있는 리모콘을 발견합니다
볼륨을 키우니, 보도 자료가 명료하게 들려오네요
아나운서: "한 달 전 'ㄱ'시에서 시작된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입자가 기이하게도 단백질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DNA나 RNA등의 유전체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환자의 체내에서 발견된 바이러스 입자가 오존 분자*와 유사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자를 과연 바이러스 입자라고 일컬을 수 있겠느냐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울러 전염성이 강하다고는하지만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동물에게서 동물에게로, 곤충 내지는 공기나 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지는 병이 아니므로 전염병이라 칭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겁니다. 일부 학자들이 지구온난화의 가속으로 인한 미지의 바이러스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한편, 당국을 포함한 WHO에서는 계속해서 질병의 감염 경로를 연구중에 있습니다."
정형화된 톤의 아나운서 멘트가 마무리 되면 화면이 뒤바뀌며 블러처리된 대형 병원들의 외관이 연이어 흘러나옵니다
이번 전염병에 감염되면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피부가 트는 등 사람에 따라 각종 면역력 결핍 증상을 보이지만, 대표적인 증상은 서서히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하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는 기자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자현:
전세계를 강타한 이번 유행성 전염병의 병명이 아직까지 공식 발표되지 않았음을 떠올립니다
증상이라 부를 것도 각기 다 다른 것이어서, 그나마 공통적인 증세라고는 고열을 앓게 된다는 점 말고는 밝혀지지 않았다니까요
환자들은 해열제 섭취 시 효과를 보였지만 일시적인 호전세를 보인 뒤 다시 펄펄 끓는 열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항간에서는 유행성 독감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던데…… 참 기묘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자현:기묘하다. 다들 아프지 말고 집에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을 다 먹고 가방을 들었다. 환자가 펄펄 끓든 팔팔 끓었든 학교는 가야 했다. 대단한 현실이었다. 열심히 가야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서, 학교로 향하기 위해 핸드폰을 확인하면, 아뿔싸!
검은 액정 너머로 비춰진 가슴팍에 명찰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요
곧 떨어질 듯 간신히 매달린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시 들어갔다 오기엔 뉴스를 보며 늑장을 부린 탓에 지각이 코앞이네요
주머니에라도 넣고 갈까요?
이자현:이거 명찰은 또 왜 이런담. 인상을 찌푸렸다. 보나마나 이다현이겠지. 또 골탕먹이겠답시고 이런 짓을 한게 분명했다. 오늘 저녁에 돌아오면 엉덩이나 발로 차야지. 명찰을 뜯어내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당신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향합니다
늘 다니던 길목에서 화창하고 잔잔한 풍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려오네요
이자현:
맑은 하늘에 가벼운 공기, 여유로은 아침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붕 떠있던 기분이 노골적으로 가라앉습니다
왜일까요?
피아노를 그만 둔 뒤로 건반에 더 손을 댄 적은 없어도 곡을 듣는 것까지 거북했던 적은 없는데……
평소에 다니지 않던 다른 루트를 이용해서라도 노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길로 등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자현:노래 소리 자체가 거북한 적은 별로 없는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는 새 음악 자체와 서먹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고. 뻐근한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다른 길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했다.
이미 한 번 음악에 대한 의지를 저버린 탓인지 청각과 마음이 전같지 않은 걸까요?
방금 느꼈던 메스꺼움도 그만둬버린 음악에 대한 내면의 적개심일 지도 몰라요
아니면…… 미련일까요?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시멘트 길의 인도를 따라,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등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씁쓸한 입맛을 돋굽니다
여름이니까요
이자현:덥다. 영 좋지 못한 기분이었다. 늘 여름이면 느껴지는 답답한 공기 자체가 별로였다. 빨리 교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교실도 별로 시원하진 않겠지만. 학교가 가까워질 수록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뛰듯이 걸어 교실로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습니다
2학년 A반, 이라고 적힌 교실의 뒷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례 직전 출석이 막 진행되려던 참입니다
선생님: "빨리빨리 앉아라."
C반 선생님의 불같은 호령이……
잠깐만, C반 선생님이요? 여긴 A반인데요?
그러고보니 자리 배치도 어제와 묘하게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당신이 허둥대고 있으면 선생님은 도끼눈을 뜹니다
분필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것이 이로울 거예요
이자현:아… 눈을 굴리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반을 착각했을리는 없는데? 선생님이고 애들이고를 둘러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옆자리 애한테라도 물어봐야하나.
급한대로 빈 책상에 앉아 책가방을 내려둔 뒤 교실을 쭉 둘러봅니다
당신은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텅텅 비어있던 열댓 개의 책걸상이 모르는 아이들의 머리통을 빼곡히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 본 적 없거나…… 아니면 복도에서 한 번쯤 보았던 얼굴입니다
역시 반을 잘못 들어온 걸까요?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도 교탁 앞에 있는 저 사람은 평소에 벌점을 남용하기로 유명한 그 C반의 담임 선생님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A반 아이들의 모습 또한 가득 찬 교실 속 틈바구니에 끼어 있군요
이게 무슨 일이지……?
다시금 교탁으로 눈을 돌리면 출석체크 진행이 한창입니다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A반 학생, 당신의 반 친구가 맞는데…… 아무래도 C반 아이들과 한데 섞여 있는 모양이에요, 어떡할까요?
이자현:옆자리 애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야, 왜 C반이 여깄어? 텃세 부리는 어린 놈 같은 발언이었지만 이 이상 좋은 대사가 없었다. 인상을 구기며 묻는 것 치고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금도영:"엥? 교실 들어올 때 현판 안 봤어? 오늘부터 C반 애들이랑 합반 수업한대. 그래가지구, 아침부터 책걸상 옮기구…… 난리도 아니었는데!"
이자현:"갑자기 합반을?"
금도영:"요즘 병결이 너무 많아가지구우."
이자현:"으…. 왜 하필 우리 담임이래."
친구는 성실히 대꾸해주면서도 아침부터 있었던 책상과의 씨름으로 무척 고단한 참인지 하품을 합니다
쩍 벌어지는 입 너머로 피로함이 다 느껴질 정돕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이자현:
어쩐지 아까부터 얼굴 언저리가 따갑습니다
이건 마치, 누군가 이 자리를 쭉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고개를 휙휙 돌려봐도 짚이는 구석이 없습니다
다들 하품을 하고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조례 풍경이네요
그렇게 출석을 부르는 소리에 한 번 대답을 내고, 재미없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곧 모든 학생의 출석체크가 종료됩니다
임시 통합 담임을 맡게 된 C반의 선생님이 교탁 위로 출석부를 탕탕, 두어 번 두드린 뒤 말합니다
선생님: "아까도 말했지만 뒤늦게 등교해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테니 다시 한 번 공지한다. 갑작스럽겠지만 오늘부터 결석생 수가 많은 반을 임의로 묶어 합반 수업을 진행하게 됐다."
성황리에 황당한 공지를 일단락한 임시 담임 선생님이 안내를 끝마친 직후 교실 앞문 너머로 사라집니다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내비쳐지는 한편, 원래 알던 사이인지 옆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이들도 눈에 띕니다
바뀐 임시 시간표에 따르면 1교시는 수학이라고 하네요
비어있던 자리가 당신의 책상이었던 모양인지 책상 사물함에 손을 넣어보면 당신 이름이 적힌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자현:다행이다. 혹시라도 내 자리가 아니었다면 급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교과서를 찾아야할 뻔 했다. 그건 귀찮아서 그냥 모른 척 남의 교과서를 써야하나 했는데. 수업의 대부분을 졸며 시간을 때웠다. 별로 문제가 되진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합반 같은 걸 하면 애들은 제각각 떠들기 바쁠 뿐이었다. 바보 같은 선생님들.
그렇게 대충 시간을 때우고, 점심까지 해결한 뒤 교실로 돌아오면 바뀐 시간표가 당신을 반깁니다
5교시는 음악수업인 모양이네요
아니나 다를까, 교실 칠판에 노란색 분필로 작성된 커다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5교시 음악이래~! 교과서 챙겨서 음악실로 이동할 것!'
하팔이면 음악 수업이라니…… 음악실까지 가기 너무 귀찮네요
책상 사물함이든 교실 사물함이든, 어쨌든 교과서는 가지고 가야 할테니 한 번 뒤져볼까요?
이자현:음악 교과서는 또 어디갔어. 책상 사물함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교실 사물함을 내가 쓸 리가 없으니까. 책상 밑에 손을 넣어 이 책 저 책을 꺼내봤다. 이건 수학이고, 이건 과학이고, 이건 뭐야. 저건가?
그건 바로…… 음악 책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사용감이 영 낯익지 못합니다
이자현:
교과서를 뒤집어 살피면, 책 모서리에 적혀 있는 낯선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정갈한 글씨체로, '2학년 C반 비모란'이라고 적혀 있네요
아침부터 합반 수업을 위해 책걸상을 옮겼다더니 아무래도 그 소란스런 틈에 교과서가 뒤섞였나봅니다
그래도, 비모란이라뇨?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에요
얼마 전에 C반 전학생이 있었다고 하던데, 설마 그 아이일까요?
뭐, 아무리 머리를 뒤적여도 명확한 정보라고는 교과서의 주인이 C반의 학생이라는 점 뿐이네요
오늘부터 전체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이 교과서의 주인도 5교시의 음악실에 나타나겠죠
일단 오늘은 이걸 가지고 가서, 같이 본 후에 돌려줘도 나쁘지 않겠어요
여기는 3층, 음악실은 5층에 자리하고 있었죠? 게다가 최근 엘리베이터 고장 문제로 여지껏 수리가 미뤄지고 있으니 하는 수 없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도록 합시다
이자현:음악실로 가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으니까. 인상을 빠득빠득 구겼다. 음악실은 왜 저렇게 높은 곳에 있을까.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한숨을 쉬었다. 모르는 얼굴을 보고 자초지종을 설명할 생각만 해도 이미 힘겨웠다. 그래도 어쩔 수는 없었다. 내 음악책이 어디있는지 모르겠으니까!
수업 시작 종울림을 목전에 둔 시간인지라 복도는 한적하기만 합니다
주욱 시원하게 뻗은 복도 창 너머로 초록이 우거지고 청음이 기승을 부립니다
여름이 불시에 목구멍에 들이닥친 듯한 기분, 그 막연함을 가르고 어디선가 나지막한 악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자현:
끊길듯 가냘픈 소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연주를 재개합니다
당연하게도 저 복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더 듣고 말고 판단할 것도 없이 피아노가 연주되어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아침에 들었던 곡소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속이 메스껍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과거에 당신이 꽤 좋아하던 곡이었기 때문일까요?
마치 태엽을 감듯 부드럽고 유연한 악상이 여운처럼 귓전을 맴돕니다
흡사 굳어버린 고목나무처럼 못 박힌 듯 서서, 이어지는 곡조를 관청하다 보면…… 꼭 본능처럼 되새겨지는 감상이랄 것이 남는 법입니다
이자현:
……순간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곡의 완성도가 훌륭하기 때문일까요? 상대는 템포와 리듬감 할 것 없이 악상의 표현이나 곡의 이해도 또한 뛰어난 편입니다
연주자는…… 고등학생이 아니지 않을까요? 당신이 알기로 이 학교에 피아노를 치는 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도요?
어쩌면 먼저 도착한 음악 선생님일 지도 몰라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닫힌 음악실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자현:음악실 문을 열었다. 이런 연주를 하는 사람은 정말 간만에 봤다. 봤다고 해도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사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전같이 연주하지 못할까봐 겁을 내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자현은 이자현이었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 괜히 의욕이 불탔다.
당신이 음악실 문을 엶과 동시에 점심을 해결하고 뒤늦게 몰려온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며 피아노 연주자의 정체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당연히도 피아노 연주는 끊긴 지 오래입니다
뒤늦게 피아노 의자를 살피더라도 아이들의 무리에 섞인 모양인지, 연주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쩐지 시무룩해진 마음에 자리에 앉으면, 음악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대화가 들립니다
학생A: "근데 누가 피아노 연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학생B: "그러게? 아니면 그거 아냐? 이 학교 원래 음악실에 귀신 나온대."
학생a: "뭔 소리야…… 너 귀신 같은 거 믿냐?"
학생B: "너야말로 못 들었어? 요즘 애들 없는 시간에 간간이 5층 음악실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 난다는 거…… 왜, 나 작년에 클래식 동아리에 아는 선배 있었잖아. 그 선배가 그러는데 축제 기간에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적이 있더래. 달밤에 핑노 소리가 나서 눈 딱 감고 음악실 문을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학생A: "아,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벌건 대낮부터 웬 귀신 얘기."
학생B: "진짜라니까?"
그런 얘기들을 들어도 어쩐지, 자꾸만 아까의 피아노 소리가 신경 쓰여요
귀신이든 유령이든…… 그렇다면 선생님도 아닌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전에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부정확하게 끌린다면 정말 귀신인 걸까요?
됐고, 신경을 끄기로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이자현:누구지. 계속 피아노만 바라봤다. 딱 한 번만 더 듣고 싶은데. 피아노를 관둔 이후 이렇게 열심히 피아노를 바라본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귀신이어도 실력 좋은 귀신이면 얘기가 달랐다.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립니다
마흔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음악실을 서성이다 각자 자리를 찾아 착석합니다
당신 또한 적당히 빈 자리에 몸을 앉히고 선생님을 기다리다보면…… 톡톡, 누군가 어깨를 두드립니다
비모란:"혹시 옆자리 비어 있는 거면, 내가 앉아도 괜찮아?"
단정한 교복, 단단한 얼굴 선으로 당신을 마주한 건, 누구인가요?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동그란 안경을 쓴 채로…… 별 저항 없이 당신의 말을 기다리는 학생이요, 그래요! 처음보는 학생입니다
C반일까요?
이자현:"어, 앉아."
비모란: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맞아. 비모란이야. 그러는 너는 이자현 맞지? 네가 대뜸 책부터 내밀었듯, 나도 책 한 권을 불쑥 내밀었다. 멈췄던 몸을 움직여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꼼꼼히 살피지 않아도 그 책이 사라졌던 음악 교과서임을 눈치챕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내미는 선이 뚜렷한 손목의 둘레를 따라 채워진 은색 손목시계의 테가 단정하게 빛을 반사합니다
시중에 저런 디자인의 시계를 팔던가? 꼭 처음 접해 생소한 이계의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사소한 감상은 뒤로하고, 그래요
책걸상을 옮겼다고 했죠? 그 소란 틈에서라면 충분히 섞일만도 합니다
문득 상대의 가슴팍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명찰에 시선이 붙습니다
광택없이 매끈한 명찰 위로 새겨진 이름은, 역시나…… '비모란'이에요
이자현:역시나. 네 명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찾아야지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좋네. 평이한 말투였다. 근데, 명찰을 보다보니 의문이 하나 생겼다. 이런걸 물어봐도 되나. 네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요, 당신은 오늘 아침 곧 떨어질 것처럼 달랑거리던 명찰을 발견해 주머니에 넣은 이래인지라, 하루종일 명찰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나는 C반의 학생,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비모란:묻는 말에 어, 어어. 다시 한 번 말을 잇기 힘들어졌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올려서 너를 보고, 잠깐 입술을 물었다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러다 결국 네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나 했다. 어떻게 얘기해야 오해를 안 사지…….
이자현:"내가?"
당신의 물음에 무언가 대답하려고 입을 벙긋대는 순간, 음악실의 출입구가 열리며 음악 선생님이 들어섭니다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금 제자리로 돌리면, 그는 어느새 정자세로 몸을 돌리고 턱을 괸 채 칠판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의문만을 남긴 채 대화는 결국 흐지부지 종결되고 맙니다
음악 선생님: "자, 오늘 78p 바로크 시대 작곡가 파트 진도 나갈 차례지? 내가 알기로 A반 C반 진도가 비슷했거든? 모두 책 펼치자."
점심 시간 종료 이후, 선생님이 음악실에 등판함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점심 식사 직후인지라 어마어마한 식곤증이 몰려옵니다
벌써부터 꾸벅꾸벅 조는 등 시동을 걸고 있는 아이들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78p를 펼치기 위해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던 당신은…… 어라? 60p쯤에서 전에 본 적 없던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소제목은 'A에 대하여'네요
원래 음악책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던가요? A라는 작곡가가 존재했던가요? 과거에 나름 오래간 피아노를 전공했던 자신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이름난 작곡가를 모를 리 없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듭니다
이자현: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린 건가? 교과서를 자세히 읽어볼까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A의 곡에 대한 기사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자현:A가 누구야. 적어도 음악책에 들어있을 법한 작곡가에 대해선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업과는 관계없지만 교과서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바로크 시대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더 듣기 귀찮기도 했고.
A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한 오래된 저택 지하실에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로 알려진 A의 악보가 최초로 발견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곡은 총 두 곡이다. 한 곡은 A의 습작곡인 <겨울이 흘린 눈물>, 나머지 한 곡은 계절 환상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두 가지의 악보가 갑작스레 도둑맞은 뒤 행방과 곡명이 묘연해졌다…….
이자현:
박스 하단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메모를 추가로 발견합니다
실제로 <겨울이 흘린 눈물>의 원본을 보았다는 예술가의 증언에 따르면 악보 <겨울이 흘린 눈물>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특이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형태가 무척 조악했으며 세월에 바래 누렇게 떠있었다고요
달리 흥미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아마 작곡가 A의 자필 사인이지 않을까요?
이자현:
마침 몇 년 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A에 대한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떠오릅나다
음악에 문외한인 인물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악보였다는 뜬소문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그게 도둑을 맞았었나봅니다
심지어 나머지 한 곡은 분실되었고요
어쨌든 도둑 엔딩이라니 별 대단한 내용도 아닙니다
악보 원본이 공개된 것도 아닌 모양인데 별 게 다 교과서에 실리는군요
그 두 곡을 제외하곤 여지껏 악보랄게 발견되지도 않았던 무명 작곡가에게 어떻게 교과서까지 신출귀몰했는지 의문입니다
이자현:
마지막으로 도둑맞은 악보를 목격했다던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알려지지 않은 환상곡 악보의 제목이 여름과 관련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보밖에 없나요? 싱겁네요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면, 얌전히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이 보입니다
음악 시간에 이러는 것도 참 드문데 말이에요
말랑한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가도 쉬이 흩어질 뿐입니다
음악실에 에어컨이 고장난 걸까요? 너무나 더워요
바깥에서는 매미가 울고 풀벌레가 나무를 깁니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있던 나비 하나가 창틀을 타고 오르다 이내 나뭇잎 너머로 자취를 감춥니다
여름이네요
이자현:음악 시간은 좀 대충 수업 들어도 될텐데. 딴짓하고 있던 손을 괜히 숨겼다. 뭐든 열심이면 좋은 거지만서도. A에 대해 다 찾았으니 더이상 수업에도 남은 용건은 없었다. 나머지 수업들을 모두 비몽사몽간에 넘겼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염증이 날 만큼 물러 터졌는데 시간은 너무나도 착실히 흐릅니다
책가방을 싸고 집에 갈 준비를 서두르며 종례를 맞이하고 있는데……
선생님: "이자현."
담임 선생님이 갑작스레 당신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각자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당신의 자리에 고였다가도 빠르게 흩어집니다
이자현:"네?"
듣자하니 임시 출석부가 음악실에 있는 것 같다며, A, C 두 반 모두 반장이 결석해 없는 고로 당신이 음악실에서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에 가져다둔 뒤 하교하라는 심부름이 떨어지네요
왜 하필 전데요? 반문하고 싶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책상 위에 음악실 열쇠를 내려두고 종례 선언을 끝마친 뒤 교무실로 사라집니다
하는 수없이 음악실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이자현:왜 하필 나야. 음악실은 보내지 않았으면 싶었는데. 힘들단 말이지. 이미 떠나버린 선생님을 붙잡아서 저 안할래요, 하기엔 너무 늦었으므로... 일을 하긴 하는데. 영 맘에 들질 않았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 다시 음악실로 올라갔다.
마스터키를 들고 5층으로 발걸음하면 음악실의 방음 문이 좁은 틈을 벌리고 열려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로 오후 다섯 시의 비산하는 빛줄기가 묘연히 바닥을 적시고 있고요
누군가 음악실에 잔류해 있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사용했던 다른 반의 주번이 잠그는 일을 깜빡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유추하고 있노라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작달막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곡은…… 익히 들어왔기에 잘 알 수밖에 없는 곡입니다
드뷔시의 달빛
누구인지 모를 연주자의 손끝에 의거하여 피아노 독주가 막 시작되는 찰나입니다
이자현:
부유하던 먼지와 공기가 미세한 파동이 되어 호수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부터였어요
종례를 할 때면 계단은 한적했고 꽤 아득히 느껴지는 상층에서는 늘 정체 모를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상대는 어쩌면 오늘 음악 시간 시작 전에 문 너머에 있었던 그 사람일 지도 모르죠
늘 환청같은 피아노 곡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기분이 좋았는지 싫었는 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은 여전히 열려있고 연주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방과후에 마음대로 음악실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할테고요
선생님께 하달받은 심부름도 있으니 당신은, 음악실로 들어가야 해요
이자현:좀 굳은 얼굴로 음악실을 열었다. 누가 연주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까지 연주를 하고 있을만한 사람이 누군지 꼭 확인해야겠다는 심보였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어도 사실은 상관없었다. 적어도 귀신 들린 피아노라면 내가 피아노를 쳐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삐끗해도 핑계댈 거리가 생기지 않으려나, 싶은 생각이었다. 근데 뭐. 일단은 음악실 문을 열었다.
문을 가르고 접어든 공간의 꼭 닫혀있던 커튼이 말갛게 걷힌 가운데, 잠시 눈앞이 하얗게 정전했습니다
산발하는 태양 빛은 이따금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습니다
눈부신 빛에 적응한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예의 그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투명한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해 고아한 빛을 뿜는 악기 너머 건반을 다르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늘 음악 시간에 함께 수업을 듣던 C반의, 비모란입니다
청명한 수풀이 푸르른 가운데 녹색으로 물든 빛이 등 뒤를 적시고 있습니다
순간 넋이 나갈 뻔 했습니다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이자현:아까 봤던 애네. 문에 기대 네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피아노를 칠 것 같지는 않았는데. 편협한 시각이었다. 네가 눈치챌때까지 이대로 지켜볼 셈이었다. 눈부신 햇빛 아래 검은 피아노, 거기에 연주하는 사람까지. 꽤나 그리운 풍경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언젠가 그만두었던 피아노…… 아니, 반대로
새로운 시도에 기뻤거나, 벅찼거나, 혹은 자신만만했을 지도 모를 과거입니다
막연한 감상은 그곳에서 흩어집니다
세상에 용기만큼이나 덧없는 기개가 또 있을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피아노를 정성껏 연주하는 그를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어떤가요?
가만히 조금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햇빛, 누군가 자신의 공간에 발을 딛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선율, 어쩐지 익숙하고 또……
그렇게 얼마간을 기대 보고 있었을까요
곡이 전부 끝나고, 비모란이 피아노 앞에 세워두었던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 뒤 주머니에 집어 넣곤 고개를 돌립니다
비모란:언제나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피아노를 치는 걸 들킨 이후엔 그리 뻔뻔하게 굴 수 없었다. 마냥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머쓱했던 건지. 문에 기대서 아무런 말 없이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는 너를 마주 봤다. 이 시간에……
=
이자현:"선생님이 출석부 가져오라셔서."
비모란:"음……."
이자현:연주해야할 일? 눈썹 한 쪽을 치켜 올렸다. 연주할 일이 뭐가 있지. 출석부를 받아들었다. 고맙, 가볍게 떨어지는 말이 산뜻한 척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해야하지. 출석부로 머리를 긁적였다.
비모란:"아, 어……."
이자현:"어, 없어. 이게 끝."
비모란:"아…… 아니, 어. 허락 받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연습은…… 내일 아침에 할 거야."
이자현:"아침에? 1교시 전에?"
비모란:"응, 조례도 전에. 일곱 시 쯤이면 좋을 것 같은데……."
이자현:"내가 유명하긴 한가봐?"
비모란:"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거 때문에 너 알고 있었다고."
이자현:"어어, 알았으니까 짐이나 챙겨."
비모란:"알았어……."
이자현: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문을 잠갔다. 힘없는 철제 자물쇠가 달캉거렸다. 이런 거로 보안이 유지될거라고 생각하다니, 오산도 크나큰 오산이었다. 가방을 고쳐멨다. 잠깐 네 질문을 못 들은 체 다른 소리를 할까 했다. 그건 좀 가오가 살지 않는 짓거리였다. 옅은 흉터가 남은 손을 네 앞에 들이밀었다.
비모란:"더 할 생각, 없는 거지."
이자현:"하고는… 싶지."
비모란:"……아."
이자현:"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야."
비모란:"그래도 괜히 들쑤신 것 같고 그렇네."
이자현:"너 아니어도 들쑤시는 놈 많아."
비모란:"왜, 반대라고 하면 재워라도 주게?"
이자현:"재워줄 순 있는데 집이 좀 시끄러울걸."
비모란:"원래 집안은 다 시끄럽지."
이자현:"그래? 데려다줄까?"
비모란:"됐어, 데려다주긴 뭘 데려다줘."
이자현:"돌아가도 상관은 없는데…."
비모란:"……물어보고, 허락 받을게."
이자현:응, 좋아. 맘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고개를 살살 끄덕이며 집 쪽으로 슬슬 걸음을 옮겼다. 뭣보다 이자현은 군말없이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나쁜 성격일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 게다가 커다란 게 그러고 있으면 왜인지 모를 뿌듯함이 샘솟아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네가 연주하던 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를 얼마일까요, 곧 집앞입니다
생각보다 즐거운 하루였어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에 들어볼까요? 그야, 내일의 일정은 다른 날보다 조금 빠를 테니까요
……
…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알람이 당신의 정신을 깨웁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가는 건 얼마만이던가요?
아니, 애초에 이런 시간에 학교를 가봤던 적이 없었나요?
이렇든 저렇든 당신은 제법 이른 시간에 등교하게 됩니다
이자현:이렇게 일찍 등교하는 건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인 것 같았다. 지각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지. 입을 꾹 다물고 아침 길거리를 걷자니 왠지 운치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개같은 소리였다. 아침 활동은 다 사라져야 지당했다.
나뭇잎 사이를 걸러 들어온 햇빛이 묘하게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오전, 공기는 제법 서늘하고 묶어놓지 않은 커튼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오늘은 내가 가장 빨리 등교한 건가?
암막 커튼과 그 위에 이중으로 쳐놓은 쉬폰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텅 빈 사각형의 교실 위로 유령의 몸짓같은 그림자가 일렁이길 반복합니다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면…… 텅 빈 서른 대여섯 개의 책상 중 유일하게 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자현:유령은 아침에는 나타나지 않는 법이었다. 별로 경각심조차 가지지 않은 채로 저기 있는 책가방을 뒤졌다. 누가 이렇게 부지런한지 확인이나 해볼 심산이었다.
책가방을 내려 놓은 직후 이곳에서 무언가를 꺼내갔는지 가방 지퍼가 살짝 열려 있습니다
가볍게 살피기만 하면 눈에 띄는 것들은 죄 평범합니다
네다섯권 정도의 얇은 악보집들과 필기 노트, 교과서 몇 권, 필통 따위의 학용품들……
이자현:악보집이라. 이 학교에 악보집을 가지고 다닐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악보집을 꺼냈다. 뭐가 있는지나 봐야겠다.
켜켜이 쌓여 있는 악보집들 사이로 표지가 누렇게 떠있는 악보집 하나를 발견합니다
다른 악보집들은 거진 새로 구매한 듯 기스 하나 없는 클리어 파일에 분철되어 있는 반면, 저 혼자서 세월의 흐름을 증언하듯 표지 색이 바래있습니다
이자현:
악보를 아예 펼친다면 음표가 수놓인 모양을 미루어 생초면의 작품입니다
작곡도 겸하고 있는 걸까요? 아울러 1p 상단에 뉴스 헤드라인처럼 자필료 작성되어 있는 곡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자현:
곡명은……
여름의 유령
인가봅니다
이자현:
첫 마디만을 살펴봐도 꽤나 매혹적인 곡입니다
불현듯 어제 5교시에 음악 교과서에서 발견했던
A는 16세기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로
도둑맞아 곡명은 미궁속에 숨어 있다던 계절 환상곡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자현:
……그런데, 어라? 이 장면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뜬금 없이 데자뷰? 물론 데자뷰란 본디 뜬금없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이자현:이런 장면을 또 어디서 봤으려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계절 환상곡 같은 거야 어디서든 구했다고 치고. 악보를 내려두고 책상을 뒤적거렸다.
아까 당신이 뒤졌던 책가방이 올라와 이씨으며, 나무로 만들어진 책걸상 모서리에 임시 시간표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왼쪽 상단에는 반과 번호를 묶어놓은 학번과 자리 주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군요
이미 눈치는 챘지만, 다시 한 번 살펴봐도 역시 비모란의 자리인 것 같아요
그리고 순간, 교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시계를 확인하면 시침과 분침은 7을 가리키고 있고 초침은 막 숫자 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약속 시간인 오전 7시입니다
약속을 어길 것이 아니라면 더 늦기 전에 음악실로 올라가는 편이 낫겠어요
이자현:시간 참 빠르다. 인상을 팍 구겼다. 누가 봐도 뒤적댄 가방과 책상을 그대로 두고 음악실로 올라갔다. 약속이 더 중요하다기보단 그냥… 네가 무슨 반응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마치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음악실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오늘은 이 너머에서 달리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군요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열려 있으므로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이자현:오늘은 피아노 안 치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별 생각없이 음악실 문을 툭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있으려나 싶어 안을 슬쩍 둘러보기도 했다.
음악실로 들어서면 어제와 같이 환하고 눈부신 햇살이 당신의 전신을 덮칩니다
이름난 과거 음악가들의 초상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음벽 어귀에 붙어 있고 교탁 너머의 칠판에는 분필 가루가 얕게 묻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깨끗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오래된 악기만이 머금은 특유의 냄새는 익숙한 종류여서, 늘 이 냄새를 기억하고 있던 심장만이 조용히 울립니다
그러니, 창틀 너머로 바람의 향이 훅, 콧잔등을 건드리면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단정하고 고요한 음악실 가운데 그랜드 피아노 앞에는 약속처럼 그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뚜껑이 닫힌 피아노에 팔꿈치를 기댄 채 얌전히, 턱을 괴고 있습니다
당신이 들어온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요
비모란:
=
비모란:눈을 감고 가만, 졸고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너무 이른 아침인가, 생각하다가도 원래는 이렇게 잠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고 곧 끊겼다. 웃는 낯을 하곤 입을 열었다.
이자현:"좋은 아침. 일찍 왔네."
조금 몸이 좋지 않은 걸까요? 체온이 꽤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비모란:"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 어렵잖아."
이자현:"그러니까. 잠 없는 사람들 참 부러워."
비모란:"그래? 그럼 그거 할래. 어차피 곡은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자현:"곡이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는 순간!
이자현이 손을 휘적이다 건드린 피아노 뒤편의 간이책상이!
덜컹, 일말의 소음과 함께 그 위에 놓여졌던 악보집들을 우수수 토해냅니다
……뭐야 이 미친 개복치같은 간이 책상은?
비모란:……? 상황을 생각하기도 전에 일단은 악보집을 주섬주섬 주워봤다. 이게 어쩌다가 떨어진 거지? 책상이 정말 간이인가보다……싶은 마음이 자라나기만 했다. 나중에 고쳐달라고 선생님에게 얘기해야지.
이자현:미친거 아냐? 책상이 왜 이렇게 약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학교 비품을 이렇게 연약한걸 써도 되는거야?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함께 악보집을 주웠다.
낱장의 악보가 발치에 채입니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내용물들을 살피니 그가 보여준 악보를 제외하고 나서도 그 수가 꽤 많았네요
훑어보면 그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만 구매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더러 보입니다
이자현:
그 틈에 거꾸로 뒤집혀 있던 낡은 악보집 한 권을 비모란이 주워 정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뒤집혀 있던 탓에 곡명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는 악보집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던 어떤 인장을 보았던 것만 같습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이자현:"야 줘봐."
비모란:휑……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빼앗겨버린 악보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 어어? 그러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망한 손도 한 번. 아무래도 네 앞이라고 긴장을 풀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런 걸 이렇게 쉽게 빼앗기다니.
오래된 낡은 악보집입니다
이자현:
제목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었는데, 워낙 필기체가 심한 터라 뭐라고 적혀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보고 싶었던 낡아빠진 악보집 어귀에 징표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자현:
아니,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요?
조악하게 본떠 넣은 듯 형편 없는 문양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자현:"제목도 못 알아보겠다."
비모란:"아……, 이거. 제목 못 읽었어?"
이자현:"별 소릴 다 한다."
비모란:"앗……."
이자현:
눈을 가늘게 떠서 보니, 어쩐지 <겨울>로 시작하는 제목으로 보입니다
이자현:"겨울?"
비모란:눈만 데굴, 굴리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적어도 지금 얘기를 해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옆으로 살살 저었다. 손을 뻗어 네가 한 것처럼 쏙, 손에서 악보를 꺼내곤 착착 정리해 피아노 의자 아래 수납 공간에 넣곤 눌러 앉았다. 네가 시무룩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까. 이제 제법 양아치 같은 모습이 익숙했으니까.
이자현:"나중?"
비모란:"화내지 말라고 그랬잖아."
이자현:녹음기를 숨죽여 노려봤다. 왜 녹음을 하지. 가끔 피아노 연습을 하는 애들이 자기 연주를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었다. 나는 그런거 안했었는데…. 피아노를 치던 시절이 좀 그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괜히 손을 뻗어 피아노 건반 하나를 쿡, 찔렀다.
비모란:네가 피아노 건반을 누름에 따라 예쁘게 이어지던 선율이 조금 어긋났다. 그런 불협화음에도 그저 웃음이 났다. 귀여운 짓을 가끔 한다니까…… 생각하며 적어도 내 목소리는 녹음기에 들어가지 않게 노력했다. 조금 웃는 소리가 녹음 됐을 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완주를 하고, 녹음기를 꾹 눌러 끄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
이자현:곡 좋다. 웃는 네 얼굴에 대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녹음이 되고 있는 연주를 망칠 생각은 없었는데, 적어도 네가 기분 나빠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연주하는 네 손등에 손가락을 올렸다.
비모란:"별로 괴롭혔다고 생각 안 해……"
이자현:"녹음은 왜 하는건데?"
비모란:"응. 녹음기를 키고 하면 내가 쳤던 걸 다시 들을 수 있잖아."
이자현:가기 싫다. 조금은 우울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진짜 싫다. 피아노 앞에 하루 종일 앉아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다시 할 줄은 몰랐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모란:손을 들어 네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한숨 쉬면 땅 꺼져. 농담을 툭, 뱉으며 웃었다. 나가기 전에 커튼을 쳐야지, 싶어서 커튼을 꾹, 잡았다. 갑자기 장난기가 일었다. 맞아, 있잖아…….
이자현:"어, 나 귀신 좋아하는데."
같이 가, 하며 비모란이 당신의 옷깃을 잡고 음악실의 문을 닫습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시선이 날아든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암막 커튼 바깥으로 빛이 차단되어 삽시간에 어두운 칠흑이 내려앉은 음악실이 유독 기이하게 빛났던 것도 같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들은 직후여서일까요?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비모란:네 옷깃을 꾹 잡곤 줄줄 따라갔다. 화났어? 삐졌어? 진짜? 귀찮게 양옆을 왔다갔다하며 네게 종알댔다. 잘못했어, 하고 애교섞인 말투도 함께였다.
이자현:"아니."
비모란:"진짜?"
그렇게, 둘은 하염없이 수업을 듣습니다
가끔 툭툭 쪽지도 주고 받고, 쉬는 시간마다 실없는 농담도 했던 것 같아요
학교의 가장 최대 이벤트인 점심 시간 또한 즐겁게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5교시의 과학시간은…… 아무래도 식곤증이 학생들의 수면욕을 지배하는 시간이겠죠
오후 1시 20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5교시, 개중에서도 물리 시간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불어오는 바람의 빛은 투명합니다
미지근한 공기가 뺨을 건드릴 때마다 어떻게 된 게 졸음만 쏟ㄱ아집니다
물리 선생님: "거시 세계를 다루는 이론을 뭐라고 한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관찰자나 광원의 속도에 관계 없이 진행중인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고 설명 해줬었지?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어허, 왜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내용은 시간의 상대성 이론과 시간여행이네요
이자현:하품이 저절로 나왔다. 뭐가 재미있는 이야기야. 선생들의 유머 감각은 어딘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된게 분명했다. 하품을 짝짝해대며 책상에 뺨을 댔다. 슬슬 자고 싶었다.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샛길로 빠졌던 수업을 재개합니다
……
…
어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물리 선생님: "다음 시간까지 시간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해 제출하도록. 숙제다!"
파격적인 숙제의 내용만이 귀에 들어옵니다
……자버렸던 것 같아요
이자현:
잠깐 벌떡, 일어날 뻔 했지만…… 시간을 보니 아직 5교시는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잠에 덜 깬 채 주위를 둘러보면,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비모란이 눈에 들어옵니다
열은 조금 내린 걸까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얼마 있지 않아 활짝 펼쳐진 틀린 페이지 위로 뜯어진 메모지 조각이 올라옵니다
이자현:뭐야. 메모지 조각을 좀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뭔데.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메모지 조각을 집어들었다.
[오늘 방과후에 시간 괜찮아? 나랑 놀러 갈래?]
이자현:
쪽지의 귀퉁이가 엉성하게 찢겨져 나간 것 같습니다
선생님에게 들킬까봐 급했던 모양이에요
이자현:'어디 갈건데'
비모란:메모지를 받아보곤, 아래에 글씨를 휘갈겨 썼다. 그래도 꽤나 예쁜 글씨체에 본인만 그저 만족했다.
이자현:시내? 나쁘지 않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를 나가기로 한 것은 좋았는데 일단 수업이 지루한 것이 먼저였다. 다시 팔에 이마를 부비적대며 잠들 준비를 했다.
……
…
하교까지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잠을 잤던 기억이 납니다
드디어, 방과후예요!
방과후에는 시내를 놀러 가기로 했죠
둘은 함께 하교길에 접어듭니다
해 지는 속도가 느린 여름인지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이릇임에도 쨍한 햇빛이 어깨를 데웁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배경을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자리합니다
비모란:"시내, 같이 가줄 줄은 몰랐는데. 기분 좋다."
닿은 비모란의 체온은, 여전이 조금 따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크게 뜨거운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자현:"네가 사줘?"
비모란:"내가 사줄게. 같이 가자고 했으니까."
이자현:"난 아무거나 잘 먹어."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가 거리에 들어섭니다
상가 거리는 이 근방에서 가장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으로 특히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몇 달 전에 비해 돌아다니는 유동객의 수는 눈에 띌 만큼 줄었지만, 그런대로 여전히 붐비는 장소네요
사거리에 접어들자 때마침 초록불이 점등합니다
간만에 나온 거리의 풍경이지만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흐릿하나마 기억을 되살려 근처 상점가별 위치를 도식화시켜봅니다
왼쪽 인도로 접어들면 뭐가 있더라……
비모란:"진짜? 그럼 나중에 꼭 갈래."
765 (GM):식당, 카페, 영화관, 백화점, 서점이 있습니다
이자현:기대하면 또 자신없는데.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나야 평생 그 음식을 먹었으니 맛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거고…. 중얼중얼 말을 이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흠.
비모란:"음, 그럴까?"
자동문 너머로 들어서니 새 책들이 모이고 고여 있는 장소 특유의 결 좋은 나무 냄새와 약간의 곰팡내가 섞인 에어컨 냄새가 느껴집니다
햇빛에 푹 절어 있던 몸이 조금은 되살아 나는 기분이네요
이자현:"서점? 나쁘지 않지. 악보 같은거나 사봤지만."
그는 당신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악보집 코너 내지는 문제집 코너 근처를 서성입니다
미리 찾아두었던 책이 있는지 검색대를 이용하는가 하면, 비슷한 출판사의 책 두어 권을 뽑아 펼쳐보기도 하며 개인적인 시간을 가집니다
무슨 책을 검색해봤는지 한 번…… 구경해볼까요?
이자현:쟨 무슨 책을 보는거야. 궁금해진 나머지 검색대를 뒤적거렸다. 검색기록을 볼 수 있던가….
뒤섞인 각종 서적의 이름 사이에서……
<의지가 꺾인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
정도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타닥타닥 검색을 하고 있으면, 당신은 금세 비모란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마치 운동장처럼 펼쳐진 서점을 휘 둘러보면 서로 다른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가지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출입객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 사이엔 책 정리로 분주한 직원들 또한 섞여 있고요
그가 있을만한 코너를 유추해봅시다
역시……음악 코너? 아니면 문제집 코너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오늘 새로 생긴 과학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코너에 들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자현:비모란은 공부를 꽤 열심히 하니까… 숙제를 해결하러 과학 코너에 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과학 코너에 가서 없으면…. 좀 짜증나는 경우의 수였다.
과학 코너에는 다른 코너에 비해 상주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다
에어컨의 냉기가 속속이 섞여든 책장 틈을 둘러보면,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군요
좀처럼 구미가 당기거나 흥미로운 책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던 당신은 부자연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살펴보면 제목은 <전염의 역사>…… 질병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기름끈이 끼워져 있습니다
이자현:전염의 역사 같은거…. 읽을까보냐, 싶었지만 왠지 읽어봐야할 것 같았다. 이건 무슨 운명의 부름이지?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겼다. 그나저나 여기 없으면 뭐, 어딨는거야. 문제집 코너 쪽을 서성거렸던 기억이 났다. 문제집을 각잡고 보기라도 하려고 하는건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음,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새 문제집을 보러 온 학생들이 각 책장마다 두셋 즐비합니다
과목별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어디를 살펴도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요
문제집 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빽빽하게 꽂혀 있는 문제집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게으른 누군가 구매를 재고하며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책일 지도 모르죠
제목은 <음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입니다
음악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문제집 코너에?
이자현:이 서점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서점, 이대로 괜찮은가. 이런 논의를 좀 해야할 것 같았다. 일단 책을 꺼내보기는 했다.
음악 코너에 들어서니 자연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과거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의 당신에게는 익숙한 장소기도 하네요
음악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다른 악보집이나 책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사이즈의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잘못 꽂아두었는지 삐죽 튀어나와 있습니다
정말, 언제까지 이럴 셈인가요?
제목은 <빠르고 쉽게 이해하는 재미있는 상대성 이론!>…… 이네요
과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음악 코너에?
역시나 페이지를 넘겨볼까요?
이자현:서점 직원들은 다 똥멍청이다. 페이지를 넘겼다.
그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여러가지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내용들이 줄글 형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자현:
<할아버지 패러독스>와 관련된 대목을 발견합니다
……책을 읽고 있던 당신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립니다
상대는 당연하게도 비모란입니다
책을 구매한 모양인지 악보와 문제집 몇 권을 들고 있습니다
비모란:"어디 있었어?"
이자현:"내가 널 찾아다녔어."
비모란:"내가 찾아다녔다니까, 참."
765 (GM):╯︿╰
이자현:하, 네 어깨를 팡 쳤다. 그렇게 신경 안써도 돼. 위로는 무슨. 위로 같은 걸 해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위로 받을 상황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네 어깨를 팡팡 때리다 웃었다.
비모란:"다행이다."
이자현:"밥먹자."
비모란:"아, 아까 책 사면서 어디 갈지 생각해봤는데…… 우리 둘이 가기엔 조금 간지러울 수도 있긴 한데, 가고 싶긴 한데……."
이자현:"나 기다리는 거 잘 해."
비모란:"뭐, 웨이팅 있으면 근처 백화점이라도 갔다 오면 되니까……."
이자현:"나 생각보다 인내심 있어."
비모란:"약간…… 소형 강아지?"
어쩐지 고급스러워보이는 외관의 레스토랑이 눈앞에 보입니다
웨이팅은 어느 정도 일까요?
이자현:
잠깐만요, 두 시간…… 이라고요?
먼저 이름을 적어두고 다른 곳을 둘러보자는 바모란의 제안이 이어집니다
이자현:"와…. 그게 낫겠다."
비모란:어쩐지 자꾸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네가 사람을 질질 끌고 가기를 좋아하거나……. 사실 후자가 정답일 것 같기야 했다. 그래서 그냥 줄줄 끌려다녀줬다, 기세가 좋네……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자현:백화점에서 사고 싶은거라. 곰곰히 생각했다. 물론 갑자기 걸어가는 길에 멈춰서서. 아무래도 백화점에서 살만한 건 아니긴 하지만 사고 싶었던 것이 있기는 했다.
비모란:"예쁜 거로 살까?"
이자현:"머리끈 정도는 내가 살 수 있어."
비모란:"옷? 어떤 거? 뭐 사고 싶어."
이자현:"생각해둔 건 없는데…."
비모란:"필요한 거 있으면 사줄게."
이자현:어휴, 네 얼굴을 보다 한숨을 쉬었다. 너 그렇게 다 해주고 싶어하다가 거지된다 거지! 저런 얼굴을 하면 도무지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문제였다. 정확히.
비모란:"거지 안 돼. 나 돈 많아……."
이자현:"돈 많아도 말이야."
비모란:"그정도는 괜찮잖아. 내가 막 몇 백만원 짜리를 너한테 사주는 것도 아니고."
이자현:"넌 가만 놔뒀다간 몇백짜리도 사줄 것 같아."
비모란:"틀린 말은 아닌데……."
이자현:"내가 라임 닮았다고?"
비모란:"약간 상큼 쪽이야. 뭔가 과즙상? 같은 거 있잖아."
이자현:"그럼 가짜로 그런 생각을 해?"
비모란:"얼굴이 재밌는 건 뭐야, 사실 못 생겼다는 뜻이지?"
이자현:"예쁘다는 뜻이야."
비모란:"너는 사실 날 웃기게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자현:"예쁘다고도 생각해."
비모란:"너 진짜 양아치 같아보여……."
이자현:"양아치?"
비모란:"너도 그럼 양아치니까 몸으로 대화하는 거 잘 해?"
이자현:"애가 애가 엄한 소리를 하네."
비모란:어감이 이상했던 걸 네가 짚어주니 영, 또 한 번 부끄러운 기분이 됐다.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얘기하며 대충 고개를 휙휙 돌리기나 했다. 그런 의미 아니었단 말이야……. 얘기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자현:"그래. 머리끈 예쁜거."
비모란:벌써 비워진 레모네이드를 보곤 역시 시원한 건 빨리 먹는구나, 같은 생각 정도를 했다. 그래도 차가운 건 몸에 안 좋으니까. 제법 늙은이같은 생각을 하며 호록호록 커피를 마셨다. 까딱거리는 손 위로 손을 살며시 올렸다. 마주치는 눈에 대고 고개를 기울이기나 했다.
이자현:"어 뭐 비슷하지."
그렇게 둘은 백화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액세사리를 비롯해 옷들을 잔뜩 구경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것들을 샀을까요, 당신?
이자현:손에 체리 머리끈과 청자켓을 들고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슬슬 두 시간이 다 지났을 것 같은데, 네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비모란:"앗, 잠시만……."
이자현:와... 나 무슨 체리 그 자체야? 웃으며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다음에 같이 놀때는 체리체리하게 올게. 눈을 찡긋했다. 아무래도 지금 티셔츠를 갈아입기엔 좀 그러니까. 머리를 대충 묶고 자켓을 걸쳤다.
비모란:"오늘 컨셉이랑 잘 맞아."
이자현:"그렇지?"
비모란:"나 왜 특별취급이야?"
이자현:"너 예쁘잖아."
식당 앞에 다다르자 입장 안내가 이어집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음식점은 패밀리 레스토랑 풍으로 잔잔한 클래식이 연주되어 흘러나오고 있으며 깔끔한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구성입니다
직원은 두 사람을 창가쪽 자리로 안내한 뒤 메뉴판을 건네주고 사라집니다
어쩐지…… 하나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구성들입니다
이자현:어째 메뉴들이 다 위압감이 넘치는 이름이네. 고개를 숙이고 메뉴판을 보다 으음, 탄식했다. 넌 뭐 먹을거야? 머리를 살살 흔들면서 메뉴판을 해독했다. 역시 무난하게...
비모란:"크림 소스 좋아해? 난 아무거나 다 좋아하는데. 맛있잖아."
이자현:"맛있겠다. 나눠먹자."
비모란:"맞아. 그래서 그렇게 먹자고 얘기한 거였어. 나눠먹으려고."
이자현:"난 됐어. 배부를 것 같아,"
비모란:갑자기, 문득 한숨을 뱉는 너를 고개를 기울이곤 직원을 손짓으로 보냈다. 괜히 소리를 죽이고 왜? 물었다. 꽤나 귀여워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서도……. 뭐, 애초에 음료를 대충 먹고 왔어서 이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괜히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맞춰 손가락을 톡톡댔다.
이자현:"그냥. 먹을 거 생각하다가."
비모란:"그래도 유전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괜찮아져."
이자현:"꽤나 로맨틱한 말을 하네."
비모란:네가 말 하는 것들을 듣다 또 한 번, 얼굴이 말랑말랑하게 풀렸다. 아니,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닌데……. 중얼중얼 얘기해봤자 네게 들리지도 않을 모양이었다. 얼굴을 테이블에 박듯이 내리고 낑낑댔다. 결국 네 말에 당당하게 대꾸할 수 있는 게 몇 되지 않았다. 손을 꼭 쥐고, 우물쭈물 말을 고르다가.
이자현:귀여워.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야. 왜인지 폭 주저앉은 머리통을
직원들이 당신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음식을 꺼내옵니다
와! 맛있어보이는 음식이에요~
역시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네요
두 시간의 맛을 하는지 어디 한 번 볼까요~?
비모란: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음식이 왔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쉽게도 손을 놓고, 앞을 채우는 음식들을 바라봤다. 아, 맛있겠다……. 생각하며 웃었다. 포크를 들고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역시, 맛있다! 눈이 조금 초롱초롱해졌다.
이자현:"아 맛있다!"
비모란:"맛있지?"
이자현:배부르다. 그릇의 밑바닥을 싹싹 긁어 먹다보니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배불러 배불러. 입가심으로 마신 물 마저 배부르는데에 한 몫을 한 모양이었다. 집까지는 걸어가야지. 결연한 얼굴을 했다.
결연한 얼굴로 시계를 보면, 대략 7~ 8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두 시간 웨이팅을 받았으니 당연한 걸까요?
여름이 농익어가며 하늘에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졌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니 교연한 노을이 상공과 구름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비모란:"아 맞아.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었는데…… 거기도 갔다가 갈래? 집에 데려다 줄게."
이자현:"들러야 할 곳?"
비모란은 당신의 손을 잡고 어느 외진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주변을 살피면 양옆으로 붉은 벽돌이 고루 쌓여 있고 그 표면을 담쟁이 넝쿨과 장미꽃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요 근처에 이런 길이 있었는지 금시초문입니다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바삐 변화하는 도시입니다
도로 위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차량이 오늘의 배기음을 터뜨리며 지나다니고, 몇 달 새에 하늘을 찌를 듯 드높게 건축된 신설 빌딩이 세워지는 것이 예사인 곳
으레 생기는 변화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내일에 적응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니까요
번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 하나가 고스란히 남겨진 듯한 풍경은 꽤 낯설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좁아지는 골목을 나아가다 보면 머지 않아 그 끝에 당도합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귀퉁이에 세워진 다 낡은 악기상 앞에 머무릅니다
쿰쿰한 나무썩은내, 비릿한 풀냄새와 한층 짙어진 여름의 오존 냄새가 머리맡을 맴돕니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악기상, 기스 투성이 전면 유리창 너머로 갖가지 악기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비모란이 악기상의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딸랑, 계절의 구색을 맞추듯 청명한 현관벨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빛이 바랜 카운터 좌석에 앉아 있던 악기상의 주인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흘끗 확인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교복 차림새의 학생 두 명이 무언가를 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나봐요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흐릿하나마 찝찔한 먼지 냄새가 납니다
살피기에는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이 인상적이고, 악기상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갖가지 악기들은 진열대 위에 놓여 있거나, 벽에 걸려 있거나 합니다
악기만큼은 애지중지 관리했는지 하나같이 먼지가 쌓아지 않은데다 광택이 돕니다
비모란은, 그러게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눈치입니다
악기들 사이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765 (GM):카운터, 책장, 악기들을 살필 수 있겠습니다
이자현:뭔가를 찾는 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간만에 악기상을 왔으니 구경이나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카운터에는 팜플렛 같은 거라도 있으려나. 고개를 기웃댔다.
팔꿈치를 올린 채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악기상 주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언가 물어보면 대답은 해줄 것 같지만, 어쩐지 적극적이진 않을 것 같은 인상이죠
카운터 위에는 낡아빠진 아날로그 시계와 라디오가 올라와 있고, 그 옆에 읽다만 신문이 놓여 있네요
765 (GM):아날로그 시계, 라디오, 신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자현:요즘도 아날로그 시계를 쓰나. 시계를 찬찬히 훑어봤다. 낡은 걸 봐선 요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요즘 같은 시대에 아날로그 시계를 사기란 좀 어려운 일이었다.
골동품 가게에서 주워올 법한 연식의 오래된 아날로그 시계입니다
시계 약은 꼬박꼬박 잘 갈아주고 있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은 별 무리 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765 (GM):끝!
이자현:관리 열심히 하셨나보네. 시계는 별 다를 게 없어보였다. 그 옆의 라디오나 보기로 했다. 라디오도 요즘은 쓰는 곳이 별로 없지 않나. 신선했다.
척 보기에도 만들어진지 기십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라디오입니다
노이즈 낀 저음질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자현:정말 여기가 악기상인지 고물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옆의 신문을 봤다. 얼마나 또 오래된 신문이려나.
잘 알려진 신문사의 주간 신문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최신 호가 아니라 몇 주 전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이자현:
기사 날짜를 재차 살피니 이 신문은 3주 전에 인쇄된 호입니다
'지난주'가 덧붙어 있는 것을 미루어 유추하건대 그 매혹적이라는 B씨의 연주는 대략 한 달 전에 콘서트로 진행되었던 모양이에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혹은 위화감이거나 어떤 감이 작용하며 드는 느낌일 지도 모르고요
콘서트가 있던 그 날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지난주 A시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매혹적인 연주로 대중을 사로잡아 화제가 되었던 유명 피아니스트 B씨가 지난 3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최초 목격자는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B씨의 자택을 찾아간 친족으로… (중략)…B씨가 연주했던 연주곡의 제목은 세간에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날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된 B씨의 곡이 과거 도둑 맞았던 <겨울이 흘린 눈물>이 틀림 없다며 악보의 출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한 음악가의 폭탄 발언에 물밑의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콘서트가 있던 그 날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이자현:
아, 생각해보니…… 지금 유행 중인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최초로 전파되었던 시기와 맞아 떨어지지 않나요?
게다가 콘서트가 있었던 예술의 전당 위치가 A시라고요? A시라면 분명……
게다가 핸드폰을 통해 찾아보니 유족이 B씨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콘서트에 사용되었던 곡의 악보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렇게 당신이 이것저것을 핸드폰으로 보고 있으면……
비모란:"돌아가자."
이자현:"너 가지고 있던 악보 어디서 났어?"
비모란:"자현아, 너는 참……"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이후 도시는 저녁 시간대 특유의 활기를 잃은 지 오랩니다
이자현:"너 나 아는거지."
비모란:"자현아, 너는 이자현이잖아. 뭐가 그렇게 어려워?"
이자현:
피아노를 바라고 있으면, 어쩐지 원인 모를 친근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마냥 가만히 있던 비모란은, 문득 녹음기를 앞에 두곤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고는 눈부실 만큼의 얼굴로 당신을 보고, 천천히 연주를 시작합니다
마치 당신만이 오롯이 소유할 수 있는 소리라는 것 같이, 자신의 음악을 전부 네게 주겠다는 듯이……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잰걸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광장의 피아노와 그에게 집중됩니다
휴대폰을 들어 연주하는 것을 촬영하거나 동영상으로 남기는 행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런 그의 연주를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어떤가요?
당신도 언젠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을 터입니다
해가 온전히 졌는데도 목구멍은 뜨겁고, 살갗은 익어버릴 듯 따갑습니다
가로등의 적적한 불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광장을 밝힙니다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허름하고 볼품없던 낡아 빠진 피아노일 지라도 그 정도의 연약한 빛을 반사할 수는 있는 모양입니다
이자현:피아노, 치고 싶다. 뭔가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무심코 앞으로 걸어나갔다. 무슨 곡을 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빛나는 피아노 옆으로 다가가 건반 위에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이 조금은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당신이 건반을 누르는 소리를 끝으로, 비모란은 연주를 마칩니다
마치고선, 당연스러운 수순처럼 녹음기를 끈 뒤 주머니에 넣고……
비모란:이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들려주고 싶은 건 오직 네게, 라는 말이 붙는 것 뿐이었다. 잠깐 숨을 멈추거나, 쉬거나, 둘 중 하나를 반복했다. 비어있는 네 손을 다시금 잡고, 웃는 얼굴을 했다. 있잖아,
=
이자현:"치고… 싶어."
순간 마음이 울렁였습니다
한참 좋아하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던 지난 날을 상기해냅니다
어떤 작은 오류도 실수도 없이 연주를 끝나쳤던 순간에 꽤 기뻐했던 것도 같은데…… 잘 생각나지는 않네요
다만 당신에게도 분명 무던히 노력하던 나날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두려울 지도 모르지만요
비모란:"괜찮아. 누구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을 거야."
이자현:"꼭 들려줄게."
비모란:그렇게 한동안은 말이 없이 손을 꼭 잡고 걷기만 했다. 피아노 소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곧 각기 갈 곳을 찾았다. 물론 그것을 연주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다, 그저 걸었다. 그렇게 네 집 쪽에 다다를 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더위 먹지 마. 조심하고,
이자현:"내일 봐."
……
…
그로부터 며칠 후, 아침입니다
숨통을 불사르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면 휴대폰에 맞춰두었던 알람이 당신을 보채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
정신 사나운 벨소리는 한참이고 이어집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머리가 띵한 것이…… 밤새 열대야에 시달렸는 지도 모릅니다
이자현:
요즘은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어쩐지 자꾸만 아릿해진다던가……
줄곧 느껴왔기에 금세 깨달을 수 있는 감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축적된 많은 문장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요근래 당신은…… 전조도 없이 가슴이 뛰곤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더 이상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만 같을 것 같기도 한……
아주, 추상적인, 그런 것들이 당신을 자주 관통했습니다
당신은 등교 준비를 끝마치고 집 바깥으로 나서기 위해 신발을 신습니다
느린 속도로 그것을 뭉개다, 끄지 않은 채로 잊고 있었던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를 듣게 됩니다
퍽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네요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속보를 다루기 위해 신설 편성되었다던 그 코너임이 분명합니다
이자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전염성 열병에 감염된 환자의 수가 전세계 인구의 25%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달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최근 전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인 기현상이 발생, 목격되고 있습니다. 증언은 일체 미열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는데요, 환자들은 하나같이 여름철의 짙은 오존 냄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밤 하늘에 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떠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 대학병원 의료진은 질병 감염에 따른 환각 증세의 가능성을… 다음 속보입니다…."
이자현:이렇게 뒤숭숭할 때 학교에 가고 싶진 않았다. 시국이나, 마음이나 하나도 평안한 게 없었다. 그래도 학교를 가긴 해야했다. 뭐든 일단 비모란이 알고 있을테니까. 연주도 들려줘야 했고. 학교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신이 학교를 향하면, 어쩐지 비모란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늘 당신보다 일찍 등교하던 비모란인데도 불구하고요
어쩐지 의아함을 느낍니다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등교하려나? 안일하게 앉아있어보지만…… 조례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이자현: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선생님은 뭔가 전달받은 사항이 있을 거란 계산 속이었다. 저, 선생님. 꽤 딱딱하게 나간 말에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아, 비모란…… 걔 아마 최근에 유행하는 그 뭐, 전염성 뭐…… 그런 거 때문에 병결했다던던데? 뭐 그래도 큰일은 아닐 모양이니 안심하고 자리에나 앉아라."
그러고보니 두 반이 묶인 뒤로부터 서넛의 아이들이 병결 처리되었습니다
메꿔두었던 책상은 다시금 주인을 잃고 방치되길 반복합니다
선생님에게 그의 병결 이유를 듣게 된 당신은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가슴이 조일 듯 답답해집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당신은 며질간 그와 질릴만치 붙어 다니며 시간을 공유했잖아요,
이럴 때 싱숭생숭하지 않으면 냉혈한일 지도 몰라요
이자현:아, 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아픈건가. 멀쩡해보이진 않았는데, 나도 옮은 거 아냐? 이마를 슬쩍 짚어봤다. 아픈 것 같진 않은데.
그렇게 당신은 조금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시간을 축냅니다
어쩐지 옆에 딱 붙어서 종알종알 얘기하던 사람이 없으니 점심 시간도, 쉬는 시간도 하물며 수업 시간도 조금 허전하네요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요? 하교를 알리는 묵직한 종례음과 함께, 번쩍! 마치 스위치를 올리듯 분산되어 있던 정신이 한 자리에서 맞붙었습니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면 책가방을 싼 아이들이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느 틈에 종례가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학교가 파했으니 집으로 귀가해야겠죠
늑장을 부리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자면, 어쩐지 모를 기묘한 이끌림에 힘입어 비모란의 책상 쪽으로 시선이 기웁니다
때마침 덜 닫힌 창문 가장자리에 불어 온 오후의 설익은 바람에 가슴이 뻐근해집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건조한 1인용의 책걸상, 비어있는 가방 걸이, 사물함 아래 가지런히 모여있는 교과서……가장자리에 [C반, 비모란]이라고 적혀있는 코팅된 시간표까지
기스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책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기이한 감각마저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제는 분명 이 자리에 책상 주인이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비어 있었습니다
그 덧없는 사실이 어쩐지 비현실 적으로만 느껴지던 그때,
이자현:
널빤지처럼 납작하고 어두운 책상 사물함 속, 켜켜이 정돈된 교과서 사이로부터 빼꼼 튀어나와 있는 찢어진 작은 종잇조각을 발견합ㅂ니다
이자현:종이를 끄집어냈다.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비모란이라면 여기에 이상한 걸 숨겨놨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종잇조각을 뒤적거렸다.
잘 닦인 도자기처럼 맨질거리는 종이를 손에 쥔 당신은 전에 없던 확신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이 종이는 마치 단서처럼, 단조롭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교실의 풍경 속 우뚝 솟아난 돌부리처럼 당신의 눈에 걸리고 말았으니까요
마치 결국에는 이 쪽지를 발견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기꺼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으니까요
쪽지를 펼쳐서 살펴보면,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주소입니다
혹은 약도이거나요
눈에 익은 글씨체만으로도 머리통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며칠 전 그와 함께 방문했던 그 악기상이 틀림없습니다
이자현:악기상에서 뭘 찾는다고 했지. 뭘 찾으려던 건지 궁금해졌다. 그때 물어볼 걸. 그 사라진 악보에 정신이 좀 더 팔리기는 했었다. 악기상을 가봐야하나.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보면, 추가적인 메모가 문득 눈에 들어옵니다
이자현:이게 뭔 뜻이야. 멍하게 종이를 바라봤다. 뭐 이딴 메모를 해놓은 거야. 지능 판정이라는 것이 있는 세계라면 한 번쯤 해서 힌트를 얻고 싶은 마음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쩐지 현재의 시간선을 다른 시간선과 이어주는 현대의 물건을 챙기고선 악기상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예를 들자면, 시계…… 같은 것일까요?
이자현:시계라.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학교 시계를 뜯어가야하나. 팔을 뻗으면 아슬하게 닿을 위치에 시계가 달려있기는 했다. 시계를 가져다 잡았다.
그렇게 당신은 시계를 가지고 끊임없이 기억을 더듬어 악기상 앞에 도달합니다
악기상 출입구에는 희끄무레하게 바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임시 휴업'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새파란 싹이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들과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 근처를 서성입니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악기상 바깥쪽의 자그맣게 무너진 울타리입니다
그 사이로 어떤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좁다란 공간은 마치 언젠가의 비밀스러운 길이 닦였다가 무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틈새는…… 어쨌든 몸을 구겨본다면 간신히 이동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이네요
이자현:몸을 꼬깃꼬깃하게 접어 틈새로 들어갔다. 열심히 들어가자 겨우 몸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작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아휴, 살다살다 이런 짓까지. 비모란을 만나면 절대 볼을 씹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모란:o O ( 깜짝 ! )
비밀의 장소로 인도하는 양 샛길을 타고 악기상 건물 외벽의 바깥 쪽을 둘러 이동하다보면, 당신은 나무가 부자연스럽게 우거진 공터를 발견합니다
이곳에 사람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메마른 흙바닥의 정가운데 뻥 뚫린 싱크홀이 나 있는 것 만큼은 예삿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구멍의 가장자리는 마치 녹은 것처럼 보이며,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웜홀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발치 아래 투영된 듯 합니다
765 (GM):산찌!
이자현:
765 (GM):1 깍깍주셍교
38도를 웃도는 축축한 여름임에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당신은 유사 이전의 세상에 인간이 최초로 빚어졌을 당시 하나의 재료처럼 장기 곳곳에 새겨져 있었던 본능으로 말미암아 어떤 메시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당신은 마치 운명처럼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어쩌면 결국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 스스로 모르는 사이 오래도록 방황했을 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구덩이를 살피면 마치 하늘을 반사한 물이라도 투영하듯 희미한 빛이 텅 빈 공간을 떠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깊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근방에선 강렬한 여름의 오존 냄새가 풍깁니다
비릿하기도 하면서 싱그럽기도 한 특유의……
765 (GM):끝!
이자현:저 구멍으로 뛰어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비현실적인 일들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 잘못된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뭐, 지금은 선택지가 얼마 없었다. 시계를 꼭 쥐고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언젠가 과거에서 그가 그러했듯, 모든 준비를 끝마친 당신이 구멍 속으로 몸을 내던집니다
찰나에 당신은 온 몸을 거스를 듯 피부를 긁어대는 어떤 비인간적인 손길을 느낍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외계의 에너지가 강압적으로 몸을 잡아 당기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
…
깜빡, 깜빡……
소용돌이치는 왜곡 속을 맨발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맞게 도착한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은 꽤 깊은 구덩이 안에 있습니다
깊은 구멍 안에 머물고 있는 탓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꼭 천장같은 푸른 색의 하늘이 원형으로 오려져 있습니다
765 (GM):오르기 or 근력(어려움)!
이자현:
765 (GM):?
이자현:당황스럽다
당신은 사방이 꽉 막혀 있던 구멍을 아래에서 위로 기어 빠져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근처를 살피면 구덩이에 뛰어들기 전에 보았던 그 공터입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이리저리 우거져 있던 나무가 바싹 말라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바닥을 장악하고 있고, 맞은 편에 보이는 악기상의 벽면은 부식되어 이질적인 감상을 더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전혀 관리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공터에서 빠져나오면 악기상 입구에 다다릅니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나 굴곡진 모퉁이를 돌아보아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공간 자체가 마치 노이즈 낀 흑백 필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로, 어떤 장소로 향하든 일말의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전깃줄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나 나무에 달라붙어 노래하는 매미의 우짖음만이 공허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역시나 악기상일까요?
이자현:머뭇대며 악기상쪽으로 갔다. 진짜 시간을 거슬러온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체 뭐가 있길래 이런 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악기상이나 좀 뒤져볼 생각이었다.
악기상을 살피면 녹슨 초인종이 달린 문은 걸쇠가 고장나 살짝 열려 있습니다
직전에 보았던 '임시 휴업' 팻말은 문간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임시', '휴업', 하고 반으로 쪼개져 덜렁거리는 탓에 다소 음산한 기운을 더하고 있습니다
닦지 않아 희뿌연 통유리 너머로 진열된 악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다 낡아가는 피아노 한 대만이 전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765 (GM):지능아님 관찰 판저엉
이자현:
765 (GM):울 애기 천재임
어쩐지 눈에 익은 피아노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아'싶은 구석이 있는 모양새인 겁니다
이 피아노는…… 며칠 전 비모란과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보았던 예의 그 피아노입니다
다 낡아 볼품 없어진 악기에 싸구려 페인트 칠을 해 디스 플레이용 구색만을 갖추고 있었던 그 피아노……
당신이 알기로 이 피아노는 분며 광장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악기상이 출처였던 모양입니다
악기상에 들어가기 전 길거리를 재차 둘러보아도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면 시계도 캘린더도 먹통입니다
들고 온 학교 시계의 침도 갈피를 잃고 고장난 나침반처럼 볼품없이 덜덜 떨고 있습니다
765 (GM):악기상이나 들어가보까~
이자현:뭐야 이건. 피아노를 훑어보다 악기상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나 캘린더가 먹통인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 피아노는 좀 뜻밖이었다. 역시 단서를 수집하는 수 밖엔 없는 모양이었다.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는 카운터 입니다
좌석에 앉아 악기상을 지키고 있던 가게 주인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텁텁하고 간지러운 먼지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도 악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은 그대로네요
765 (GM):카운터 책장 볼 수 잇달쥐
이자현:카운터를 기웃거렸다. 그 낡아빠진 시계와 라디오가 그대로 있을지, 또 다른 신문이 있을지가 궁금했다. 비모란도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쯧.
쓸쓸한 카운터 위에는 다소 눈에 익은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계와 라디오에 먼지가 그득 쌓여 있습니다
이자현:얘네라도 그대로라 다행이었다. 라디오를 기웃거렸다. 한참 낡았으려나. 일단 먼지가 쌓인 걸 봐선 꽤 오래 안 쓴 모양이었다. 라디오를 톡톡 털었다.
치직…… 치지지직…… 완전히 고장나버렸는지 탁한 백색소음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주파를 맞춰보고 툭툭 두드려도 보지만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765 (GM):기계수리 판정을 할 수 있는데 없겠죠?
이자현:
765 (GM):아깝다
이자현:
라디오에서 눈을 돌리면 그제야 희미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칙, 치지직… …사망한 인구가 전체 인류의 70%에 육박했습니다. …… 치직, …그 누구도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인류는 역사에서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가설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들은…전염병이 사실은 어떤 저주이며, 감염 경로가 특이하게도 …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이 되는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만이…… 치직…"
이자현:
765 (GM):광공
이자현:ㅇ 0ㅇ
765 (GM):끝!
이자현:사망한 인구가 7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것도 악보의 저주 때문이라니. 의심해본 적이 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 악보를 그럼, 바로 태웠어야하는건가? 내가 있던 곳이 과거고…?
먼지 쌓인 아날로그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약이 거의 다 되어가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그러모아 간신히 뜀박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 부자연스러운 점은 바늘들이 하나같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공전해야 할 궤도를 떠나지 못한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련의 반복된 패턴이 기이합니다
765 (GM):산쮜
이자현:
도둑맞았는지 듬성듬성 비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악보집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는 더욱 무거워졌고,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절반쯤 튀어나와 있는 책자도 여럿 보입니다
불현듯 떠올립니다
피아노를 그만둔 뒤 악보를 어떻게 관리해왔더라, 하고……
그래서 더 살필만한 건 없나? 책상 모서리에 어쩐지 달력 하나가 박힌 못 위로 장식물처럼 걸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자현:악보라…. 악보를 소중히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며 악보를 찬찬히 보기엔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달력을 보는 게 먼저였다.
달력은 6월에 펼쳐져 있습니다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몸통만한 달력을 쳐다보던 당신은 달력 어귀에 적혀 있던 올해의 년도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네 개의 숫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2022년……
이자현:
세상의 오류를 알리듯 거꾸로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와, 당신이 살던 현재로부터 조금 동떨어진 세월의 흐름을 가리키는 달력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오가지 않고 시야는 마치 흑백필름을 끼워 넣은 것처럼 생기 없었습니다
미지의 구멍, 그곳에 마치 운명같은 이끌림을 얻어 겁없이 뛰어든 당신……
당신은 눈치챘겠죠
나는 가까운 미래에 도착했다, 라고요
이곳은 2022년, 인구의 70%가 잠들어버린 뒤 고요한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3년 후의 미래입니다
이자현:
=
비모란:o O ( 야오옹 )
이자현:"미쳤어 미쳤어……"
당신이 악기상을 열고 나오면, 끝없는 열기에 데워진 아스팔트가 일렁이는 건너편 골목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당신을 반깁니다
비모란:"한참 찾았어. 몸은 괜찮아진 거야?"
그의 품에는 악보가 들려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교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그의 가방 사이에서 보았던 그 악보집이 틀림없습니다
이자현:"그거 악보……!"
비모란: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상한 소리한다, 또. 대충 웃으며 네 머리를 뭉개기나 했다. 아프면 들어가서 누워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얘기하는 목소리가 나즈막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사실은 당장 약속할 수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뭐,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시작은 떨리는 법이었다.
그 말을 남긴 그는 마치 모든 결정과 준비를 끝마친 사람처럼, 미련없이 당신을 지나쳐 악보를 들고 깊고 커다란 구멍에 뛰어듭니다
떨어지는 구멍 위로, 당신은 오로지 한 마디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사이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어떤 이유에선지 과거의 당신을 찾기 위해 과거로의 리프를 앞둔 그에게, 실제 '과거'의 당신은 어떤 말을 던질 건가요?
건넬 말이 없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할 지도 몰라요
이자현:"미친놈아 좀만 기다리라고!"
그렇게, 당신이 한 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2022년에 묶여있던 몸은 다시금 2020년의 악기상 앞에 서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는 보이지 않고, 한가로운 골목길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이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구멍에 뛰어들기 전 들고 있던 학교 시계를 살펴보면, 박살이 나 있네요
악기상 유리창 너머의 아날로그 시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정갈하게 돌아갑니다
휴대폰 캘린더를 펼쳐 살펴도 달력은 올바른 날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꿈이라도 꾼 걸까요?
단지 꿈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하기에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이자현:"비모란 이 새끼 어딨어."
어느덧 저녁이 쏟아지고 밤으로 물들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습기가 발목을 잡는 듯 합니다
한밤 중의 여름은 습하니까요
매년 이맘때쯤 장마 전선이 북상하고는 했으니, 시간이 부지런히 흐른다면 며칠 안 있어 많은 비가 쏟아질 터입니다
당신은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몇가지 기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전봇대를 붙잡은 채 119에 고열의 두통을 호소하다 잠들듯 바닥에 쓰러진 환자의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한편, 급히 출동하던 엠뷸런스가 어느 사거리에서 승용차와 부딪히는 등의 사고가 잇따라 발생합니다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소름끼칢만큼 많은 별의 형상이 아른거립니다
학교에 도착해 음악실로 향하면 정해져 있는 수순처럼 열려있는 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닫히지 않은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의 유영에 빼곡히 덮인 커튼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하늘댑니다
이자현:음악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열려있어서 좀 머쓱해졌다. 머쓱하게 음악실 안으로 들어가 피아노 의자를 들췄다. 분명 여기에 넣었었는데……. 중얼중얼대는 목소리가 좀 음산하기도 했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수납서랍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낡은 악보집 하나가 눈에 띕니다
이자현:
<겨울이 흘린 눈물>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낡아빠진 악보집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징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자현:
그래요, 그때…… 그가 쏟았던 악보집들 사이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섞여있던, 당신이 쥐곤 놓아주지 않았던 그 악보집에도 이런 그림이 박혀 있었습니다
조악하게 본떠 넣은 듯 형편없는 문양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이는 문양은 꼭 도는 것 같기도 하고……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기이한 홀로그램 같은 형상에 어쩐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이자현:
악보를 태우기 위해 음악실을 벗어나려던 당신은 눈앞이 하얗게 아른대는 듯한 잔상을 보았습니다
과연 잔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물에서 올라오는 듯한 인광의 기둥은 평범한 사람의 의식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영상도 초월하는 재앙과 비정상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단지 빛은 이제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의 형체 없는 흐름은 구덩이에서 곧장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는 듯 합니다
순수한 색채의 형태로 나타난 이계의 지성체, 세상에 알려진 어떤 스펙트럼과도 닮지 않은 희미한 색을 내는 비실체…… 우주에서 온 색체입니다
이자현:
아른거리던 색체는 곧 작은 개미지옥을 만들어낼 듯 당신의 육신을 에워쌉니다
순간,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듯한 역겨운 오존 냄새를 맡았습니다
올 여름 내내 맡아왔던 비리고도 싱그러운 냄새입니다
이자현:
비모란:
우주에서 온 색체:
이자현:
끈적하고 불쾌한 비실체가 몸 곳곳에 들러붙는 감각을 뿌리치고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습니다
이자현:이게 음악실의 유령인가? 짜증이 났다. 지가 뭔데 귀찮게 굴어! 일단은 음악실을 나가는 게 중요했다. 나가서 빨리 이걸 태워버려야지.
그리고 순간, 강한 힘이 당신의 팔을 잡아당겨 음악실 바깥으로 끌어냅니다
내가 밤에는 음악실에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을 확인하면 아니나다를까 결석했던 비모란입니다!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집니다만, 그조차도 당신이 들고 있는 악보집을 확인하거든 빠르게 누그러듭니다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붙잡힌 통에 팔 전체에 전해지는 체온이 36.5도를 훌쩍 넘어섰음을 눈치 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몸은 불 위에 올려둔 물처럼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쭉 당신을 찾아 헤매고 있던 걸까요?
이자현:"너 아프잖아."
비모란:눈을 깜빡였다. 어? 어어……. 어? 갑작스럽게 입술에 닿은 게 이게 진짠지 아닌 지도 모르는 와중이었다. 열이 올라서 지금 환각이……? 아니면 지금이 과거가 아니고 미래인가? 당여늣럽게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뭐야……? 답잖게 처음인 것처럼 입술을 가련히 가리고 물었다. 너, 너……
이자현:"응 했어."
비모란:왜, 왜 얘는 이렇게 당연스럽지……? 싶어서 눈썹이 처졌다. 원래 안 이러는 거 아냐? 아니면 원래 고등학생들은 이러나? 물론 미래에 아무리 이렇고 저런 걸 다 했다고 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모를텐데? 머리가 빙빙 도는 와중에, 뭘 더 해야 하냐는 질문이 들려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뜬금 없지만 선생님이 내주셨던 과학 숙제 이야기야.
이자현:"아 못하니까 니가 안하고 있었겠지."
비모란:네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낑낑댔다. 아직 고등학생인 애가 말을 뭐 이렇게 한담. 눈을 깜빡이면서 입을 꾹 물었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자현아. 당황한 것에 비해선 진지한 말투였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어. 지금까지의 말 중 가장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꼭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참을 입을 다물던 그가 다시 한 번 입을 엽니다
비모란:"있잖아, 자현아. 아직도 피아노 연주는 하고 싶지 않아?"
낡고, 오래 되었고, 허름하며, 손때 묻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건네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비춰진 그의 낯빞이 어쩐지 창백해보이기도 합니다
잠깐, 시간이 지나고 그는 당신에게 조그맣게 한 마디를 더 이어붙입니다
꼭이야, 하고…… 약속을 하는 듯이
이자현:"할 수 있어!"
비모란:"음…… 아. 학교에 소각장 있잖아."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키스를 남긴 그는 등을 돌려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그를 잡아 세울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무지개를 손으로 잡을 수 없고 햇빛의 뜨거움을 유리병 속에 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미래에서 너를 봤어, 미래로 가서 너를 만났어……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당신에게, 그는 그런 대답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자현:분위기 잡긴. 일단 마음이 급했다. 소각장까지 한걸음에 뛰어갔다. 소각장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악보를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빨리 여섯시가 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소각장의 불에서, 악보는 빛이라도 내는 것마냥 타오릅니다
오늘은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였어요, 그렇죠?
내일은 중요한 일도 있고 하니 집에서 편하게 쉬어볼까요?
이자현:중요한 일이 있는데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으려나 싶기는 했다. 그래도 내일은 피아노를 쳐야하니까…. 피아노를 치는 게 너무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좀 예상 외였다. 집에 가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피아노 안쳤는데.
당신은 집에 도착하고는, 내일의 일을 가늠하며 눈을 감습니다
이런 때에도 쉽게 졸음이 밀려오네요
아무래도 잠을 이길 수는 없나봐요
……
…
비가 퍼부을듯 빽빽한 수증기가 마른 길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오늘의 해는 일찍이 시들 요량인가봅니다
하늘을 켜켜이 감싼 먹구름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의 부탁을 기억하고 광장으로 나갈 건가요?
이자현:비내리는 날 피아노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물론 피아노의 생명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안 쳤다간 내 생명이 장담할 수 없게 된다고. 짜증스러운 상황이었다. 궁시렁대며 옷을 챙겨입고 악보를 들었다.
당신은 꼭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서, 광장을 향해 걷습니다
평소보다 적은 수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 광장은 요 근방에서 유동객이 많은 장소로 손꼽히는 장소입니다
중앙에 마련된 분수대 앞에 놓여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페인트 칠을 해두었지만 좀처럼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는 낡고 오래된 악기가 꼭 고물처럼 보입니다
점점 더 무채색해지며, 점점 더 다채로워지는 모순적인 세계에 도태되어 있습니다
그 허름한 피아노에 다가서는 것은 오로지 이자현, 당신 뿐이겠죠
당신이 연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피아노 의자에 앉을 차례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비모란은 보이지 않고, 시간은 점점 6시에 가까워지는 이릇입니다
이자현:비모란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은 시무룩한 채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내가 피아노에 손을 제대로 올리는 순간을 봐줬으면 싶었는데. 한숨을 쉬었다. 막상 피아노를 치려니 손이 뻣뻣했다.
당신은 시간의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악보대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나이를 먹고 자란 곡을 올려둡니다
음표를 빼곡히 채워 넣은 악보는 종이가 어찌나 얇고 덧없는지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립니다
이 악보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나 특별한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부탁했었죠
언젠가 당신이 최초로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처럼 어깨 끝을 살짝 떨면서……
차가운 공기 한 품 찾아볼 수 없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의 정가운데서 마침내 건반에 손을 올려둡니다
잊고 살던 서늘한 냉기가 백건과 흑건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깨를 익힐듯 강렬하던 더위가 한풀 꺾입니다
추억으로 남길 뻔 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남을 느낀 것은 그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나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번 연주를 그만 두었던 당신이 과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요?
도망치듯 반대로 뛰어 가능한 먼 곳으로 숨었던 당신은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다시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만한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765 (GM):향상된 이자현의 피아노 연주 기능치는, 104입니다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절망과 꺾인 의지만이 잔재한다면 한 번 좌절했던 당신이 이렇게 무사히 피아노 앞에 앉게 될 수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릇:머 절케 높아요
눈 앞에 놓인 골목의 폭이 서로 다를 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좌절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선택을 번복하고 버텨내는 겁니다
765 (GM):피아노 판정을 진행합니다
그릇:의미가 잇어????
765 (GM):하시라고욧.
그릇:
765 (GM):당신 말고
이자현:
이자현:피아노를 치는 것은, 그것도 초견인 곡을 치는것은 정말 간만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첫음을 누르는 순간 됐겠거니, 마음이 편해졌다. 비모란이 없는 게 조금 슬플 뿐이었지만.
연주가 시작되면 바쁘게 거리를 활보하고, 때로는 흐릿한 풍경에서 벗어날 듯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기이하게 물들었던 별빛 하늘이 풍향을 따라 꽃가루처럼 걷히고 가슴 위에 얹힌 듯 반죽되어 있던 아픔과 좌절이 단 하나의 점이 되어 흔적을 달리합니다
……
곡이 끝맺음과 동시에 건반에서 손가락이 떨어지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립니다
뉘엿뉘엿 져가던 하늘에 수놓였던 수억 개의 별들이, 세계를 숙주삼아 성장하던 색채의 무리가 모두 걷혔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인파가 흩어지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비모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
…
그의 전학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돌아온 월요일의 아침에서였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묘연히 사라져버린 그를 수소문 했을 수도 있고, 그를 만나기 전의 평범했던 하루처럼 모든 사건을 잊은 채 나날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고열의 전염병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혼란했던 세계는 평화를 되찾습니다
고열에 시달려 병결했던 아이들도 모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울다 지친 매미가 늦여름의 끝에서 기나긴 생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계절이 순환합니다
10대의 끝, 졸업식을 하루 앞둔 당신은 책상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반과 반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눈에 익은 글씨를 확인하면 틀림없이 비모란의 글씨체입니다
접힌 자국만이 선명하고 흐릿하게 번진 연필 자국은……
[2022년 여름의 악기상에서 다시 만나자.]
반짝, 하고…… 마치 빛을 받은 유령의 신호처럼……
END1 Da capo!, 처음으로 돌아가
~에필로그~
장마전선 소식이 들려오던 여느 2022년의 여름, 세간에 알려진 '정체불명의 전염병'사태가 종식된 날로부터 약 3년이 흘렀습니다
좁디 좁은 골목을 돌아 울타리 어귀에 멈춰선 당신은 영업 종료 팻말이 걸려 있는 악기상 건물을 바라봅니다
관리 되지 않아 써어가는 나무벽은 꼭 악기상이 아닌 잊혀진 어딘가의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합니다
그나마 빨갛게 돋아난 덩쿨 장미가 건물 외벽을 타고 자라난 풍경만이 음산함을 닦아낼 뿐입니다
당신은 걸쇠가 앞길을 가로막은 악기상 처마 아래서 낡아빠진 피아노 한대를 발견합니다
3년 전의 그 피아노임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간 이미 여러 차례 이 악기상을 방문했으니, 전에는 이 피아노가 이 자리에 위치해 있지 않았음을 떠올립니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했던 피아노의 재등장입니다
765 (GM):칠이 더욱 벗겨진 피아노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자현:저 녀석 오랜만이구만. 더 꼬질꼬질해진 녀석을 두리번대며 살폈다. 요 녀석은 도대체 무슨 피아노길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인지.
악보대 위에는 반듯하게 펼쳐진 악보 하나와 더불어 사용감이 남아 있는 녹음기 하나를 발견합니다
녹음기는 피아노만큼이나 눈에 익는 종류입니다
3년 전의,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그 녹음기니까요
이자현:저것도 있네. 녹음기를 들어 흔들어봤다. 애도 고장난 거 아냐? 아닐 수도 있지만. 악보도 뒤적댔다. 저건 또 뭐야.
녹음기 전원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들어옵니다
텅 비어 있는 폴더 속에서 음성메시지 한 건과 지금까지 연주한 횟수 만큼의 피아노 연주 녹음 파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악보는, 당신이 좋아한다던 악곡들 뿐입니다
음성메시지를 재생하면 3년 전에 녹음된 파일로, 다소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노이즈낀 음질 틈을 파고든 그의 목소리가 새파란 여름의 골목길에 흩뿌려집니다
세 바퀴 순환하는 계절을 거슬러 마침내 3년 후의 미래를 현재로 만든 당신에게,
비모란:- 안녕, 이자현. 피아노 연주 잘 들었어.
과거로 향하는 구멍에 뛰어들기 직전 악기상 앞에서 널 마주쳤던 일이 있어. 그런데 그게 실은 '너'였던 거야. 내가 찾아 헤매길 자처했던 3년 전의…….
나는 마치 음악실의 유령처럼 그 어떤 기척도 내지 않고 숨죽인 채 네가 이곳에 이끌려 스스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이지 유령처럼, 질량도 형체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무덥고 침침하던 과거의 여름 속에서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너를 홀려낼 생각 뿐이었던 음악실의 유령처럼……
음성 메시지가 종료되면 어디선가 비릿하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불어옵니다
멍하니 녹음기를 든 채, 혹은 악보를 펼친 채 망가져가는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당신의 어깨를 톡톡, 누군가 두드리겠죠
불현듯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비모란입니다
2022년, 두 번째 첫 만남.
알고 있나요? 두 사람은 괴멸해가던 일전의 미래에서도 2022년에 이 피아노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어떤 악보와 함께,
……
…


기준치: | 80/40/16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3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70/35/14 |
굴림: | 1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중얼중얼 얘기하다보니 아까까지 옆에 이자현이 없었다는 걸 깨닫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너어어. 야아! 목소리가 높아지기 전에 합, 숨을 집어 먹었다. 너 지각이구나아.
"이럴 줄 알았음 나두 지각이나 할 거얼……."

아…. 일단 의문은 해결했다. 왜 합반을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서도. 지각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는 제쳐두고 의자에 몸을 편안하게 기댔다. 근데 왜 선생님은 저 선생이야? 우리 담임은?

책상에 엎드림에 따라 당연스럽게 목소리가 늘어졌다. 유독 결석생 많은 반은 오늘부터 일케 묶어가지구 수업할 건가바. 볼이 눌려서 웅얼웅얼, 소리가 귀엽게 나왔다. 그래두 암만 끼리끼리 감염 안 된다구 그래두 이 시국에 학교라니…… 도앵 서러어. 눈썹이 조금 처졌다.
"울 반 선생님두 감염이라 병가 내셨대. 그래가지구 그때까지 C반 호랭이가 통합 담임이라던뎅."

저 호랭이가 병가면 오죽 좋아. 투덜대며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았다. 전염병인가 뭔가가 위험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냥 따로 수업 좀 하든가 학교를 쉬게 해주면 오죽 좋아. 여러가지로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준치: | 80/40/16 |
굴림: | 3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A반 C반은 미술, 음악 중에 음악 과목을 선택한 반이지? 비슷하게, 미술을 선택한 B반은 D반과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이다."
"A반 선생님이 유행성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 되셔서, 오늘부터 내가 A반과 C반의 통합 임시 담임을 맡게 됐고. 참고로 우리 반은 지금부터 A-1반이다. 이상, 조례 끝. 다들 조용히 1교시 준비하도록."



기준치: | 80/40/16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3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손끝으로 네 어깨를 두드린 주제에, 하는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이럴 땐 조금 더 돌려서 얘기해야 잘 먹혔나. 영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잠깐 인상을 쓰고, 이게 아닌가 싶어 고개도 기울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음악책을 네 앞에 보였다. 혹시 얘 알아? 웬만하면 다 얼굴을 아는데 눈 앞의 얼굴이 낯설어서 괜히 한 번 물어봤다. 이런 건 늘 때려 맞추는 게 최고라니까.

"아까 아침에, 책상을 옮기면서 우연히 섞여든 것 같아서."

"나 오늘 명찰 없는데 내가 이자현인 줄은 어떻게 알았대?"

"그냥,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 유명하잖아."

유명했나. 흐음,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려 네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어떻게 유명한데 내가? 애들이 뭐래? 이렇게 말하면 다현이가 무섭댔는데. 생긋 웃었다.
"유럽 문명사에서 지칭되는 바로크 시대란 보통 17세기를 가리킨다는 거, 저번 시간에 먼저 얘기했었지? 17세기의 예술을 가리킨다고……."

기준치: | 70/35/14 |
굴림: | 4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80/40/16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5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도 교과서에 담아준단 말이지. 좀 흥미가 생겼다. 어딜 봐도 교과서에 담을 이야기는 아닌데. 몰래 핸드폰을 켜서 작곡가 A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아마 교과서보단 더 상세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7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선생님이 부를 일은 없을텐데. 사고를 치거나 한 기억도 없었다. 눈이 떨렸다. 분명 별 일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나 진짜 아무 짓도… 안했겠지?


기준치: | 75/37/15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100/50/20 |
굴림: | 4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언젠가 시작했던 피아노
에 대해 떠올립니다
"음악실은 무슨 일이야?"
(To GM)rolling 10+2d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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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부 못 봤어? 음악실 안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움직여서 출석부를 찾을만한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도 있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음악실은 무슨 일이야? 입시라도 해? 말 끝에 웃음이 섞였다.

잠시 뜸을 들이며 교탁으로 가 출석부를 찾았다. 아, 정말 두고 갔나보네. 출석부의 위가 반질반질했다. 가볍게 그걸 들고, 네게 건넸다. 아니, 그냥. 별 건 아니고…… 며칠 뒤에 연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연습하고 있었어."

"잘하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잠깐 고장난 듯이 허우적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 고마워……? 갑자기 칭찬 들을 줄은 몰라서……. 말끝이 괜히 늘어졌다. 이거 말고,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대? 괜히 말을 돌렸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출석부를 팔락거렸다. 커다란게 파닥대고, 재밌네. 문에 더 편하게 몸을 기댔다. 더 연습해? 괴롭히려는 건 아닌데, 과하게 당황한 모습을 보니 좀 웃겼다. 더 연습하면 구경 좀 하게.

너도 올래? 물어놓고 조금 급하다싶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빨리, 게다가 이렇게 쉽게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멍청해보였겠지. 잠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뒀다. 근데 그보다 출석부로 팔락대거나 머리를 긁거나 하는 건, 좀…… 양아치 같았다.

일어날 수 있으려나. 형한테 출근하기 전에 깨워달라고 해야하나. 입으로 똑딱, 소리를 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더 할 거 아니면 같이 교무실 갔다가 집 갈래? 몸을 살짝 일으켰다. 짐 챙길 거 기다려줄테니까.

아무리 얼떨떨해도 해주겠다고 한 이상 뒤로 뺄 생각은 없었다. 연주를 듣고 피드백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가끔 레슨 해주던 선생님이 유행성 독감에 걸리셨거든.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 뱉기나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 피아노 치잖아."

피아노 치는 것도 아네. 조금은 가라앉은 눈으로 너를 훑었다. 피아노 치다 관둔 애로 알기라도 하나보지. 이런 거로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지났는데. 괜히 손등이 저렸다. 주먹을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나보고 봐달라고?"

손끝으로 네 가슴 언저리를 톡톡, 쳤다. 명찰 없는데 이름 안 거, 눈치챘을 것 같아서. 한창 당황하던 얼굴이 여유를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네가 같이 하교하자고 했던 것 깉가도 했다. 아, 그것도 대답 해줬어야 했는데……. 조금 급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물어뜯기라도 한대? 왜 저렇게 쫄았담. 네 어깨를 톡 쳤다. 날 뭐라고 알고 있든… 신경 안 써. 누가 봐도 신경쓰는 목소리였다. 망했네.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신경 안 써, 안 쓴다고. 너를 흘깃 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근데 누가 들어도 신경 쓰는 것 같은데……. 말이 조금 흐렸다. 고개를 좀 갸웃대다 근처에 있던 책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나도 종례 때 다 챙겨서 올라온 거라, 더 없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같이 가자. 문 잠글 거지? 일상적인 말들 사이로 의외가 툭, 튀었다.
"그만 둔 거야? 피아노."

"요러한 이유로. 관뒀어."

별 생각 없는 물음이었다. 얇고 긴 손이 피아노 위에 얹어지는 걸 상상했다. 언제나처럼 흩어지고, 모였다가…… 선율이 되는 걸 기억했다. 아……. 그리고 탄성이었다. 미안, 너무 실례되는 말을 했지 내가. 곧 바닥을 보던 얼굴을 올렸다. 직선보다 조금 아래 네 얼굴이 존재했다.
"못 들은 척 해줘. 가자."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야. 별 일 아니라는 듯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뼈가 부러져서 붙는데에만 몇 개월이 지났고, 그 몇 개월 동안 피아노는 커녕, 웃음이 뚝 멎었다. 네가 못 들은 셈 쳐달라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화제였다. 일정한 박자로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늘어지는 발소리를 가만 듣다 작게 입을 열었다. …나도 할 수만 있으면… 하고 싶어….

음. 말이 질질 끌렸다. 가만히 곁을 걷다 손을 뻗었다. 아프지 않게, 살살 손을 잡았다.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입을 다물고, 차마 앞서 손을 끌 순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냥, 네 뒤를 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결국 고민은 쉽게 말이 됐다. 그, 있잖아. 자현아.
"미안."

나도 너한테 화내진 않아. 네 얼굴을 보고 웃었다. 난, 엄한 곳에 화내는 사람은 아니거든. 무엇보다 이 건은 책임이 단 한 명에게 또렷이 존재했다. 손을 잡아주는 건 고맙지만, 네게 살짝 몸통박치기를 했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까지 함께였다.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건 그냥 내 선택이야. 언젠간 괜찮아져서 칠 수도 있겠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괜히 몸을 부딪혀오는 게, 왠지 친구 같았다. 게다가 킥킥대는 웃음까지. 자동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집 어느 쪽이야? 같이 갈 수 있는 데까진 같이 갈게. 여름은 나즈막했다. 고작 들리는 소리라곤 숨을 들이키는 소리, 그리고 매미의 울음 소리 정도였다.

집에 들쑤시는 놈이 둘이나 있다 둘이나. 아주 질린단 얼굴이었다. 저번에 동생이 내 방에 들어와서 무슨 소리했는지 알아? 네쪽으로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지구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이자현 오셨다고 그랬어. 교무실 바로 코 앞에서 숨죽여 웃었다. 별로 웃긴 소리는 아니긴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출석부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좀 가면 있는데, 반대만 아니면 좋겠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출석부를 잡았다. 교무실의 문을 열고 능글맞게 웃었다. 아이고, 선생님. 오는 길에 자현이랑 마주쳐서요, 네. 제가 다~ 해놨죠. 문 잠그는 것도 똑똑히 봤어요. 기계적으로 휘어진 눈가로 네 쪽을 흘깃댔다. 이렇게 해야 빨리 끝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럼 저희 가보겠습니다? 하하. 급하게 네 손을 잡고 교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휴. 귀찮을 뻔 했다, 그치.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네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멍청하게 허둥거릴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들한 구석도 있네. 네 말마따나 내가 들어갔으면 한참을 잡혀서 새로운 일거리를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꽤 모범생인가봐. 네게 잡힌 손을 꼬물락거렸다.

말 해놓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음, 우리 집안은 아니지만.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쉬운 건지 아닌 건진 모르겠는데, 나 집 그쪽 방향이야. 말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우리 집이 너희 집보다 조금 멀 것 같아. 넌 요 바로 앞이라며. 아까는 정말 당황했던 거 뿐이라는 듯 발라붙는 말들이 붙임성 있었다.

어차피 집 가서 할 것도 없거든. 흘러내리는 가방을 그냥 한 손에 쥐고 어깨에 걸쳤다. 꽤나 양아치 같은 몰골이 됐지만, 뭐… 어때. 언제 한 번 와. 간단한 말투의 말도 함께였다.

괜찮아. 얘기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넌 나 데려다주면 돌아가야 되는 거잖아. 종알종알 대답하며 가방과 너를 바라봤다. 양아치 같은 느낌……. 입밖으론 뱉지 않고 짧게 웃었다.
"나중에, 갈 수 있으면."

네가 그렇다면 말지 뭐. 웃는 얼굴을 보다 같이 피식 웃어버렸다. 나중에 꼭 와. 네 손목을 잡았다. 뭐든 두번이고 세번이고 물어보면 폐가 된다고 했다. 한번 아닌건 아닌거니까. 굳이 박박 우겨서 따라갈 문제도 아니기도 했고.

생각보다 애 같네, 같은 생각을 했다. 사실 나이로 치면 애가 아니진 않았지만, 뭐든 사람은 본인을 어른스럽다고 평가하곤 하니까. 어깨나 으쓱해보였다. 그럼 다음에는 네가 데려다줘. 오늘은 먼저 들어가고.




기준치: | 80/40/16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이건 왜 혼자 이런 색이야. 오래 된 악보를 계속해서 물려물려 쓴다는 말도 들어보긴 했다만. 악보를 조심조심 펼쳤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2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A에 대하여
대목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어요겨울이 흘린 눈물
과 곡명이 알려지지 않은 의문의 계절 환상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고 했던가?여름의 유령
이 정말 300년 이상 된 곡이라면 겨울이 흘린 눈물
과의 작곡 시기가 얼추 맞물린다는 사실을 눈치챕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6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To GM)rolling 1d100<60
(
)
25
1 Success

"좋은 아침."

졸려보인다. 옆에 다가가 네 머리를 툭 건드렸다. 아, 이러면 싫어하려나. 멋쩍음을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옆에 앉았다. 간만에 앉는 피아노 의자가… 생각보다 딱딱했다. 고개를 잠깐 숙였다.

안 그래? 괜히 물으며 중얼중얼대기나 했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더 아침에 약했는데, 나이가 들 수록 괜찮아지더라고. 쓸데없는 얘기를 이어나가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악보 몇 개를 보여줬다.
"이중에서 좋아하는 곡, 있어?"

우리 형은 매일 잠 설쳐서 퀭하게 회사 가던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악보를 건성으로 훑었다. 어차피 너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인 편이었다. 악보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거 좋아했는데."

너무 되도 않는 말을 했나, 싶어서 잠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눈치를 보는데, 뭐…… 이정도로는 별 생각 없겠지, 싶어 괜히 횡설수설 말이나 덧붙였다.
"아니, 뭐…… 원래 그거 할 생각이기도 했고. 연습해볼테니까 괜찮은지 봐줘."
기준치: | 50/25/10 |
굴림: | 2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네 손을 잡아챘다. 입을 가리고 눈치를 보는게 참 같잖다는 생각을 했다. 어라, 스러운 말은 해놓고 횡설수설하긴. 가볍게 인상을 쓰고 너를 보다 손을 내려놨다.
"곡이 중요하지. 뭐 일단 그거 할거라니까…. 해봐."
기준치: | 35/17/7 |
굴림: | 66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80/40/16 |
굴림: | 96 |
판정결과: | 실패 |

네 어깨를 툭 치고 악보집을 가로챘다. 싸가지 없는 짓이었지만 뭐 어때. 궁금한 것은 참으면 병이 되는 법이었다. 자필 사인이 있을 정도의 악보집은 한 번 구경하고 싶었다.


기준치: | 46/23/9 |
굴림: | 50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70/35/14 |
굴림: | 6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3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다시 네게 악보를 건넸다. 빛나는 문양이 있는 건 조금 신기하긴 한데. 네 쪽으로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야,
"넌 저거 제목 읽을 줄 알지."

다행이다, 하는 말은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서는 옅게 웃었다. 이건 내가 연주할 수 없도, 연주해서도 안 되는 곡이야. 의미심장한 말이 부러 낮게 목소리를 내리깐 입밖으로 흘렀다. 마치 괴담을 얘기할 적처럼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끔 책이나 영화에서 봐서는 안 될 그림이나 알려서는 안 되는 주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잖아. 그런 거거든."

다시 네 손에서 악보를 뺏었다. 연주할 수 없는 곡이 어딨어. 인상을 벅벅 구겼다. 네가 못하면 나는 할 수 있고? 웃음 섞인 목소리가 표정과 좀 안 어울리긴 했다. 이런 일로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안되는데.

또 허망하게 빼앗겼다. 조금 곤란한 얼굴로 널 내려다보기나 했다. 아니, 이건 못하는 게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거라니까? 중얼대는 말이 조금 억울함을 담고 있었다. 내 손에 있는 걸 두 번이나 뺏어가다니.
"진짠데……"

기준치: | 35/17/7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46/23/9 |
굴림: | 87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70/35/14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100/50/20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겨울 뭐라고 적힌 것 같기는 한데. 답답해서 괜히 짜증이 났다. 악보를 네 옆에서 팔랑거렸다. 빨리 바른대로 말해봐. 이게 뭔데. 말하는 투가 또 양아치 같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는 연주 할 수 없는 거고, 다른 사람들은 연주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네가 못 읽었다니 다행이다. 나중에 얘기해줄테니까 화내지 마."
잠깐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가는, 달래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물었다. 피아노…… 쳐줄까?

나중 언제. 악보를 네게 넘겨주고 부루퉁한 얼굴로 너를 노려봤다. 궁금한 것을 남겨두는 것은 절대 정말로 취향이 아니었다. 너를 툭 밀고 피아노 의자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피아노의 까맣고 하얀 건반을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울 뭐시기 못 치는 비모란 씨의 다른 피아노 곡이나 들려줘봐."

칭얼대는 얼굴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뗐다. 말랑한 볼이 움푹 들어갔다가 다시 동그랗게 올라왔다. 귀여워! 하지만 티내지는 않았다. 또 귀여워한다고 삐지면 어떻게 해. 눈을 깜빡이다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피아노 위에 올려뒀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마음을 가득 담아 피아노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기준치: | 100/50/20 |
굴림: | 6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귀엽게 뭐 하는 거야!"
(To GM)rolling 10+1d20
10+
(
)
1
11

"괴롭히는 짓."

그냥 귀여웠는데.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뭐, 실제로 귀여운 건 맞았으니까. 손등 위로 올라온 손가락이 조금 차가웠다. 녹음기를 챙겨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녹음기를 돌려서 네가 장난쳤던 부분을 돌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괴롭힘이면 자주 받아도 될 것 같아."

너도 연습용? 고개를 기울였다. 귀여워하는 걸 뭔가 반응해서 더 재밌게 만들어주진 않을 작정이었다. 흥, 고개를 처들고 입술을 꾹 물었다.

게다가 봐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시기가 시긴데…… 어쩔 수 없지. 웃으며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생각해보니 시간이 어떻게 됐지, 싶어서 시계를 봤다. 조례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게 이제 나가야 될 모양이었다.
"……역시 아침은 빨리 가네."


"해가 지고 나서 학교의 음악실에 들어오면 안 된대. 음악실에 귀신이 나오거든. 마주치면 큰일 날 지도 몰라."
장난기가 섞였지만, 짐짓 심각한 투였다.

팔짱을 끼고 툴툴댔다. 그런 말엔 안 속아. 게다가 머리를 쓰다듬었겠다. 수업을 들어야하는 것도 심란한데 머리까지 쓰다듬다니 너무 심각한 행동이었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 등을 돌렸다.
"먼저 반 갈거야."
기준치: | 70/35/14 |
굴림: | 95 |
판정결과: | 실패 |

"반에서도 모른 척 할 거야?"

좀 짜증낸 거 가지고 쫄지 마! 네 손을 잡아챘다. 정신사나우니까 주변 맴돌지도 말고. 너를 살짝 흘겼다가 픽 웃음을 지었다. 안 삐졌어.

안 삐졌으면 됐어. 옷깃 대신 손을 꼭 잡고는 말랑말랑하게 웃었다. 이제 또 하루종일 수업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시무룩했다. 벌써 반에 다달았다는 것도 조금은. 아, 하루종일 놀고 싶다…….
"적어도 강한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한다는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블랙홀은 시공간에 구멍을 뚫는다고 별표까지 달아줬을 거야. 교과서 확인해 봐."
"다들 졸고 있는 것 같으니 잠깐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볼까? 다들 어렸을 적에 시간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 있지? 실제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경우 광속에 가까워질 수록 시간이 느려지니까, 빛보다 빨리 나아가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하지만 빛보다 빠른 물질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2011년에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 CERN에서 초광속입자 해프닝이 있기도 했는데, 궁금한 녀석은 학교 끝나고 찾아보도록 해라."
"공부를 제대로 한 녀석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시간과 공간이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르게 나아갈 경우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게 아니라 허수의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즉,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위해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지. 우주 끈이나 웜홀을 사용한다거나. 하지만 웜홀이 그저 가상의 이론 상태일 뿐인 지금, 시간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어딘가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미지의 구멍이 생겨나지 않는 이상 말이야."
"자, 과연 미래에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할까? 혹여나 그렇게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은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기준치: | 70/35/14 |
굴림: | 4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80/40/16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빠르게 네 글씨 밑에 다섯 글자를 휘갈겨 썼다. 어차피 승낙하려고 마음먹긴 했다. 그래도 너를 괴롭히고 싶기도 했고…. 무튼 메모지를 넘겼다.

'시내 나갈 건데 같이 가자.'


웃는 얼굴로 네 손을 잡아 끌었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이기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게 될 것 같았다. 서점을 가야 해서, 안 그래도 시내에 가야 했거든. 근데 혼자 서점만 갔다 오기엔 너무 아쉬워서 같이 가자고 했지 뭐야. 자꾸 종알종알대는 말투를 보면, 역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시내 같이 가는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츤데레 마냥 툴툴댔다. 서점을 가는 건 좋았다. 생각보다 책 냄새라거나, 종이 질감이라거나.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맛있는 저녁에 더 관심이 있기야 했지만.

얘기하며 한참을 걸었다. 시내까지 생각보다 얼마 안 걸어도 되는 줄 알았는데, 꽤 머네. 시무룩하게 중얼대기도 했다. 원래는 이거보다 조금 덜 걸렸던 것 같은데……. 갸우뚱,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아무데나 갈까? 맛있어 보이는 데로."

한식, 일식, 양식, 중식…. 중얼거리다 흠, 입술을 삐죽였다. 나중에 우리 집 같이 가자. 오늘은 말고 나중에. 네 손을 꾹꾹 잡았다. 우리 집 음식점 하거든, 꽤 맛있어.

맛있다고 하니까 기대되네. 작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중에 뭘 먹어야 하지……. 고민했다. 이쪽 시내는 정말 오랜만이라서 뭐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는 중이었다.

"일단 서점 간다고 했으니까 서점부터 갈까?"

서점, 서점……. 기억을 더듬으며 서점을 찾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모양 빠지게 길을 잃지는 않았다. 네 손을 잡고 서점 안으로 이끌었다. 서점 좋아해? 책이라든가…….

책은 내 돈 주고 사본 기억이 없네. 서점을 둘러봤다. 여기도 어딘가 악보가 많지 않을까 싶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사실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4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역시 음악 코너인가. 얘는 어딜 이렇게 싸돌아다녀. 짜증을 벅벅 내며 음악 코너로 갔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80 |
판정결과: | 실패 |

찾아다녔네. 얘기하며 들고 있던 책들을 뒤져 하나를 건넸다. 네 생각이 나서 샀어. 웃는 얼굴이었다. 책 제목은 <의지가 꺾인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어쩐지 제목을 보니 네 생각이 났다는 건 얘기해주지 않기로 했다.
"이런 거도 읽어줘?"

어딜 그렇게 빨빨대고 돌아다녀? 네 엉덩이를 툭 쳤다. 건넨 책을 보곤 웃었다. 넌, 저거… 내 생각해서 가지고 온건 아니지? 인상을 빡 구겼다. 나 의지 꺾여보여?

얘기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기분이 나쁜 건가? 의지가 꺾인 건 아닌가, 생각해보면 의지는 있지만 치지를 못하는 건가……? 내가 너무 넘겨 짚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약간 애매한 얼굴이 됐다. 음, 그건 아닌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중얼댔다.
"위로가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이젠 슬슬 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얘기하며 정말 안도했다는 듯 웃었다. 같이 피아노, 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얘기하며 산 책들을 가방에 넣고, 꼼지락 꼼지락 네 손을 잡았다. 귓가가 붉었다.
"그럼…… 어, 이제 어디 가고 싶어?"

너를 찾아 서점을 거의 다 돌았던 탓에 배가 보통 고픈 게 아니었다. 네 손을 잡고 식당가 쪽으로 질질 끌었다.

네 눈치를 약간 보면서 웃어보였다. SNS에서 핫하대. 소문의 맛집이라던데…… 체인점이거든. 중얼중얼 얘기했다. 언제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못 왔던 게 영 아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양식집이기도 하고, 운이 안 좋으면 웨이팅이 조금 길어서……."

상상 이상이지. 게다가 때가 조금 지나서 웨이팅이 좀 적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뭐, 기다리라고 해도 기다릴 의향은 있지만. 네 손을 다시 죽죽 잡아끌었다. 어딘데.

네 대답에 환한 얼굴이 됐다. 웃으며 죽죽 잡아 끄는 대로 따라가다, 길은 내가 알고 있었네 싶어서 곧바로 앞장섰다. 이쪽으로 가서, 우화전 하면 돼. 얘기하며 널 데리고 길을 헤쳐나갔다.
"잘 한다고 해줘서 고마워. 기다리는 거 사실 그렇게 안 좋아할 것 같이 생겼거든."

진짠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네 뒤를 졸졸 따라갔다. 데려다주는 게 감사하긴 한데, 나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거야? 툴툴대는 게 꼭 툴툴이 스머프였다.

툴툴이 스머프를 닮은 것도 같았지만, 그렇게 얘기했다가는 정말 토라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얇게 눈을 휘어 웃으며 깔깔댔다. 일단 귀엽잖아. 착하고, 또…… 사람 좋아하고. 이건 아닌가?

기준치: | 35/17/7 |
굴림: | 96 |
판정결과: | 대실패 |

아무리 기다리는 걸 잘한다고 해도 한 곳에서 가망없이 두 시간을 기다리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한 시간 정도 앉아있다보면 이상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백화점이나 구경하자. 너를 다시 질질 끌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나 머리끈 새로 사야돼."

사줄게. 얘기하면서 끌려갔다. 백화점에 가서 사는 게 고작 머리끈이라니. 생각하니 조금 웃겨졌다. 근데 그거 하나로 되겠어?

흥. 더 비싼 걸 사달라고. 꽤나 뻔뻔하게 모가지를 처들었다. 머리끈 말고 또 살게 뭐가 있을까. 네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또 뭐 사지? 옷 같은 거라도 볼까?"

달래는 투가 됐다. 머리끈을 사줄 수 없다는 게 조금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면 그거 사고 1층에 카페도 있다니까 에피타이저로 음료수라도 먹을래? 고개를 기울였다.

일단 가서 보다보면 물욕이 생기지 않을까나. 흥얼거렸다. 백화점 가는 것도 오랜만인데. 네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피타이저도 나쁘지 않아.

이번엔 진짜 내가 사게 해줘. 눈썹을 늘어트리고 부탁하듯이 말했다. 이러면 대부분 다 들어주니까……. 뭐, 안 들어줘도 어쩔 수 없겠지만. 몰래라도 사줄 거지만.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놀러 나온 거잖아."

"그럼 음료수나 사줘."

진짜야. 얘기하고는 생각했다. 음료수는 별로 안 비싼데…… 정도의 생각이었다. 어릴 때부터 돈이면 다 된다는 사상을 주입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입밖으로 안 내밀었다.
"그거면 돼? 무슨 음료가 좋은데?"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세 번이 되고 나면 많아도 떨어지는 게 보일걸. 인상을 푹 썼다. 음료수면 돼. 음료수가 딱 좋아. 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레모네이드"

대충 1층을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레모네이드 하나랑 커피 하나를 시키고는 말똥말똥 너를 바라봤다. 레모네이드라…… 조금 시지 않을까, 생각하다 이자현 자체가 조금 새콤한 분위기라 관두기로 했다.
"자몽에이드도 좋아해?"

눈치 보면서 몇십짜리 사줄 것 같은 상이지. 네 허리를 쿡 찔렀다. 커피를 마시는 너를 잠시 상상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차분하고….
"에이드 종류는 다 좋아해."

중얼중얼 얘기하다 웃었다. 그런 게 잘 어울리긴 해. 제일 잘 어울리는 건 라임이나 레몬이야. 이자현 라임 닮았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얘기하며 눈을 휘어댔다.
"귀여워."

킥킥대고 웃었다. 라임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나 상큼해? 시큼해? 웃음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목소리 끝이 말려올라갔다. 아, 이렇게 말 안하기로 했는데.
"네가 더 귀여워 멍청아."

라임 탈을 쓰고 통통 튀는 이자현, 정도를 생각하고 웃었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트로피카나?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혼자 생각하면서 웃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더 귀엽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네가 더 예쁘고 귀여운데……. 중얼거리는 소리가 공기로 바싹 닿을 정도였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뺨이 서로 닿을락 말락한 거리였다. 매일 보는 내 얼굴 같은 건 별로 감흥없어. 네 얼굴이 훨씬 재밌어, 예쁘고. 손 끝으로 네 뺨을 콕 찔렀다.

얘기하곤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가까워진 얼굴에 가볍게 입술이라도 맞추자는 건가, 싶어서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레모네이드 한 잔이요~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귀만이 아니고 얼굴이 빨개졌다. 네, 네에……

그대로 테이블에 팔을 괴고 머리를 기댔다. 바로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에서 찬 기운이 훅 올라왔다. 시원하다. 눈을 반쯤 감고 흥흥, 콧노래를 불렀다. 네 얼굴이 빨개진게 웃겼다. 재미있었다.

얘기하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괜히 뜨거워진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아, 진짜……. 더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는 건 조금 모순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가운 손끝으로 자꾸 커피만 쓸었다.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부끄러워……."

그건 팩트잖아.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를 홀짝 댔다. 아, 시원하다. 앞에 있는 네 얼굴이 좀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쟨 왜 저렇게 부끄럼이 많냐, 귀엽게….
"예쁘질 말든가."

중얼대다 커피나 입에 댔다. 아무 생각 없이 너처럼 들이키려다 혀가 조금 데였다. 아뜨뜨……. 티는 내지 않았지만 잠깐 인상이 써졌다. 인상을 쓰는 김에 꿍얼꿍얼.
"누가 할 말인데……."

어? 너 지금 나 보고 양아치랬냐? 네게 주먹을 쥐고 흔들어보였다. 양아치는 몸으로 대화한다고 이놈아! 인상을 쓰는 꼴이 아주 웃겼다. 흥.
"내가 좀 예쁘긴 해."

흔들대는 주먹이 조그맣고 말랑해보이기만 했다. 알맹이가 꽉찬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누구든 힘을 줘 치면 아프지 않진 않겠지만…… 조그맣고 팔랑댈 것 같은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둥둥 띄우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니, 뭔가 어감이 이상랬던 것 같기도 하고.

흥얼대며 다시 레모네이드를 홀짝였다. 몸으로 대화하는게 뭔 줄 알고 어머. 진심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어투였다. 때릴걸.

"머리끈이랑…… 이것저것 산다며. 그거나 사러 갔다 오자."

남은걸 한번에 다 들이켜고 네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머리끈의 정석인 체리 머리끈 같은 걸 살까. 거기에 어울리는 자켓을 살까. 흥얼대며 손을 까딱였다,

"이거 아냐?"

잡고 일어나란 뜻이긴 했는데. 흠, 비슷했으니 봐주기로 하고 네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돌아다녀야 마실거로 채운 배가 좀 꺼져서 맛난 걸 먹지.

"야 밥먹자."

네 손에 다시 한 번 이끌려 가면서도 낑낑댔다. 아까 너, 옷 볼 때 이거 선물로 주려고 샀단 말이야. 중얼중얼 얘기하며 뒤에 숨겨뒀던 쇼핑백을 꺼냈다. 뿌듯한 얼굴로 내민 것은 흰 티셔츠였다. 뒤에 말랑말랑해보이고 커다란 체리가 그려져 있는.
"오늘 컨셉은 체리인 것 같아서……"

"어울려?"

완전 체리체리하네. 대꾸해주며 웃었다. 그래도 여름인데 덥지 않으려나, 싶긴 했다. 청자켓이니까. 게다가 머리도 긴 편이고. 그렇지만 역시 그것과는 별개로 체리에 체리를 입은 걸 보니 마음에 들었다. 귀엽다.
"예뻐."

좀 예쁘게 웃어봤다. 이왕 예뻐해주고 있으니 확실히 예쁨 받자는 생각이었다. 흠흠. 콧노래를 불렀다. 나 예쁜거 잘 안 보여주는데 넌 특별 취급이야. 기분 좋게 사족을 붙였다.

이자현 나 좋아해? 물으며 약하게 웃었다. 어떡해, 다른 애들은 너한테 예쁘다고도 못 해주고…… 억울하겠다. 이렇게 예쁜데. 그리고 중얼중얼 사족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히 더운데도 손에 깍지를 꼈다.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아주 단순하게도.

재밌기도 하고. 손을 꾹 잡았다. 따끈한 체온이 닿아서 홧홧하게 열이 올라오는데도 그냥 손을 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곧이곧대로 좋아한다고 말할 마음은 없었다. 이자현이란.

"난 크림소스 스파게티."

그럼 나는 해산물 리조또 먹을까? 크림 소스가 하나 있으면 토마토도 하나쯤 있으면 좋잖아. 먹고 싶었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므로 눈이 조금 빛났다. 먹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역시 누구랑 뭘 먹느냐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조용하기만 하고 건조한 식사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크림 소스만 먹으면 느끼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네 말을 이어받아 신난 투로 중얼거렸다. 양식은 간만이었는데 어색한 티가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괜히 신이 나선 발을 동동거렸다.

얘기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세워 메뉴를 읊어주면 직원은 메뉴판을 짚으며 다시 한 번 메뉴를 확인했다.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입모양으로 물었다. 한창 많이 먹을 시기고, 나이니까.

원래 많이 먹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키가 안크나. 저와는 다르게 훌쩍 큰 동생을 잠시 생각하다 문득 시무룩해졌다. 있는거라곤 얼굴 뿐인 나보단... 키도 크고 예쁘기도 한 동생이 더... 아휴, 한숨을 쉬었다.


조금 먹으니까 키가 안 크고 키가 안 크니까 슬프다... 그런 생각 있잖아. 목소리가 우물우물 기어 들어갔다. 아휴, 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빨리 밥이나 나왔으면 좋겠어.

이러저런 유전자 중에 너를 구성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마. 단점도 아니고. 종알종알 얘기하며 손을 뻗어 네 말랑말랑한 손을 쥐었다. 조금 주물대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와중이었다. 그냥, 아주 막연하게……
"나는 그냥, 너니까 구성요소 같은 게 어떻든 상관 없는 거 같아. 네가 좋으니까 그것도 좋아지는 거지."

비모란 완전 플레이보이야. 웃으며 네 뺨을 잡았다. 말랑한 뺨을 꾹꾹 누르니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저런 말을 누가 계속 해주는 걸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버린단 말이지. 딱히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애정에 목마른 편이니까... 아무래도...

"나 플레이 보이는 아니야……."

쓰다듬으며 웃었다. 말 한 마디에 낑낑대고 힝힝대는게 꽤나 재미있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언제 밥 나오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래도 기다릴만 했던 것 같고……."

입에 스파게티를 한 입 넣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맘에 드는 맛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신이 난 나머지 하항, 웃음이 커졌다. 기다린 값까진 모르겠지만 먹을만 하다! 네게 동의를 구하듯 빤히 바라봤다.

하항, 하고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은 웃음에 따라 웃어버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렇게 열심히 같이 입에 음식을 넣다보면 음식음 근세 바닥을 드러냈다. 아무리 얼마 안 먹는다고 해도 나이는 나이인가……! 배가 통통했다.


왜 지금까지 까먹고 있었지, 싶어서 그냥 웃었다. 너도 좋아할 거야. 단언하듯 얘기했다. 뭐, 악기를 싫어할 리는 없었을테니까. 주위를 슥슥 둘러보다 당당하게 음식점을 결제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너를 바라봤다. 잘 했지, 같은 느낌의 얼굴이었다.

어딘데? 네 팔에 팔짱을 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뭔가 같이 카페 가고 쇼핑하고 밥먹고 집 데려다 주고... 데이트 같다. 네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지난주 A시에 위치한 예술의 전당에서 매혹적인 연주로 대중을 사로잡아 화제가 되었던 유명 피아니스트 B씨가 지난 3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최초 목격자는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B씨의 자택을 찾아간 친족으로… (중략)…B씨가 연주했던 연주곡의 제목은 세간에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날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된 B씨의 곡이 과거 도둑 맞았던 <겨울이 흘린 눈물>이 틀림 없다며 악보의 출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한 음악가의 폭탄 발언에 물밑의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주변을 휘휘 둘러봐도 찾던 게 없었다. 약간은 시무룩해진 채로 어깨를 으쓱해보이기나 했다. 찾는 악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없나 봐. 팔리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하다……. 중얼중얼 얘기하며 네 손을 잡아 이끌었다. 바깥은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집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네, 싶은 기분이었다.

그거 제목이 겨울로 시작했지. 신문을 톡톡 건드렸다. 여기서 B씨가 연주한 곡이 겨울로 시작하고… 악보가 발견되지 않았고, 치면 안되는 곡이라고 하고. 그게 B씨가 연주한 곡이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악보, 그 곡에 뭔가 문제가 있는거야?

예나 지금이나 머리가 좋네. 영악하고,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이어지는 말들이 전부 꿈같았다. 웃는 얼굴이 늘상의 그것이었다. 어깨를 대충 으쓱해보였다. 날이 추워. 게다가 시간도 늦었고 말이야. 네 손을 부여잡고 그대로 거리를 걸었다. 짙은 땅거미가 아스팔트와 돌바닥을 기기 시작한 저녁과 밤, 그 사이의 애매한 시간. 소등되어 있던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씩 점등하며 온전히 어두워지진 않은 길을 비췄다.
"똑똑해. 나는 애매하게 굴지 않고 싶어. 그러니까 말해주는 거야."
손을 쉿, 하는 모양새로 입 가까이에 올렸다. 맞아. 비밀이야.

그러니까… 날. 뭐라고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 말이야.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시간을 되돌아 온 사람이라도 돼? 추측이라고 내놓는 말들이 온통 얼토당토 않은 말들 뿐이라 점점 골이 아파왔다. 네 팔을 꾹 부여잡았다.

그냥 그런 거야. 나는 그런 네가 좋아. 얘기를 하다 보면 귀갓길 광장에 놓인 낡은 피아노가 보였다. 아, 저게 여기에 있었구나. 괜스레 중얼거린 말이 네게도 닿았다. 네 손을 끌고, 천천히 피아노를 향해 다가갔다. 낡디 낡아 의자에 앉는 사람도, 건반에 손을 대는 사람도, 하다못해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이 분수대 맞은 편에 그저 장식물처럼 배치 되어 있는 나무 피아노. 손끝으로 건반을 쓸어내리며, 찰나 네 손을 놓았다. 피아노 의자에 가볍게 엉덩이를 붙였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76 |
판정결과: | 실패 |


"아직도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아?"
(To GM)rolling 10+1d20
10+
(
)
15
25

손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근데, 근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오는 건 부정적인 말들 뿐이었다. 안 친지 너무 오래 됐어. 재활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도 않았고… 내가 피아노를 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전처럼 좋은 음악이 흐르지 않을 지도 몰라….

너는 여전히 소중해. 너는 늘 괜찮고, 나는…… 네가 언제, 뭘 하든 좋아. 문득 튀어나오는 불협화음 까지도. 얘기하는 내내 시종일관 다정한 눈이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턱도 없이 손가락이 얽혔다. 시계를 봤다. 늦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늦었어. 집에 가야겠다, 정말…….
"대신 나중에 들려줘. 네 피아노 소리."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말이 과하게 다정해서 그랬다. 모두 괜찮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간만이었다. 하나 같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말을 할 뿐이었다. 연주가 망가져도 괜찮다거나, 늘 괜찮다거나. 그런 말을 들으면 어쩔 줄 모르고 졸아들기 마련이었다. 네 손을 꼭 부여잡았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뭔가 답답하면서도 시원한 하루였다, 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네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생각이 많아진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기준치: | 100/50/20 |
굴림: | 9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비모란 왜 학교 안와요?"


기준치: | 80/40/16 |
굴림: | 11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1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4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 구멍에 뛰어들어야 해!


기준치: | 60/30/12 |
굴림: | 7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ㅇ 0ㅇ
뭐야 얘



기준치: | 75/37/15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갑자기 이자현 똑똑해짐




기준치: | 10/5/2 |
굴림: | 16 |
판정결과: | 실패 |
아깝다

기준치: | 10/5/2 |
굴림: | 55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10/5/2 |
굴림: | 1 |
판정결과: | 대성공 |



기준치: | 69/34/13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저게 무슨 시계야….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책장이나 볼 생각이었다. 책장에 뭐라도 더 있지 않으려나 싶기도 했다.


기준치: | 75/37/15 |
굴림: | 4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69/34/13 |
굴림: | 93 |
판정결과: | 실패 |
rolling 1d3
(
)
1
1


내가 미쳤나봐…. 중얼대며 악기상을 빠져나왔다. 길거리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미친 사람인 줄 알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멀쩡한 사람이 있긴 할까 궁금했다. 그럼 대체 난 이제 뭘 해야하지? 멍하게 앞으로 일단 걸어나갔다.

안 그래도 아픈 애가 왜 나다니는지. 한숨을 폭, 쉬고는 웃으며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나 했다.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물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네게 숨기고 싶은 건 없었기 때문에.
"과거로 가서 너를 만나고 올게. 생각해봤는데, 문제 없을 것 같아. 네가 정말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했더라면 지금 이 악기상에 찾아오지도 않았을테니까."

네 품의 악보로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아픈 애? 지금 나를 착각하고 있는건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픈거야? 네 손을 꼭 잡았다. 나, 나 여기 이자현 아니야. 말이 계속 샜다. 과거로 안 만나러 가도 돼. 내가 걘거 같아…. 그거 악보부터… 그거 이상해….

"갔다 오면 뽀뽀해줄게."


씩씩대며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갔다. 물론 다섯 걸음만에 멈춰서기는 했다. 것보다 망해먹는 미래 세계가 더 급했다. 내가 아프다잖아 미친! 악보 어딨어! 원을 세 바퀴 정도 그리며 돌다 학교로 향했다. 음악실에 갈 작정이었다.


기준치: | 46/23/9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77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68/34/13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악보를 집었다. 짜증나. 계속 기이한 기분만 느끼고 있다보니 내 이름이 이자현인지 이기이인지 헷갈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인상을 벅벅 구겼다. 악보새끼 태워버려야만.

기준치: | 68/34/13 |
굴림: | 6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75/37/15 |
굴림: | 5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50/25/10 |
굴림: | 3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50/25/10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75/37/15 |
굴림: | 6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안 쉬고 여기서 뭐해. 네 손을 잡았다. 악보는 내가 태울테니까… 괜찮아. 네가 하라는 거 다 할게. 쉬어도 돼. 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지. 일단은 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해준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뽀뽀했어……."

그래서 또 뭐하면 되는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태우기만 하면 돼? 또 이런거 있는 악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해?

"선생님은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지에 대해 물었잖아. 어떻게 생각해?"

어깨를 탁 쳤다. 빨리 뭐 해야하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또 뽀뽀할거야. 인상을 찌푸렸다. 허리를 쿡쿡 찔렀다. 말해 빨리 말해.


눈을 깜빡였다. 뽀뽀는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물을 건 이거 뿐이었다. 가방을 뒤져 악보집을 찾았다. 그걸 구겨질 듯 잡고, 입술을 깨물고, 어렵게도 네게 건냈다. 자현아. 나는 네가 뭘 하든 좋아. 뭘 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부탁이 하나 있어.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오후 6시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광장에서 이 악보를 연주해 줘. 꼭 그 광장이어야 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시간에, 반드시 이곡을 연주 해줘야 해."

악보를 받아들었다. 지금이면 할 수 있어! 네 덕분에 할 수 있어. 네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피아노 연주 잘 할게, 진짜. 그리고 있지. 말을 잠시 멈췄다. 라이터 같은 거 있어? 이거 태우게.

거기는 어때?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환한 얼굴의 이자현. 웃는 이자현. 피아노를 상상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이자현. 내가 아는 이자현과는 조금, 아주 조금 달라졌다지만…… 나는 이런 이자현이 좋았다. 사실은 정말로 어떤 이자현이든, 전부 좋았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집어 먹었다가는…… 천천히 네게 다가갔다. 뜨거운 입술이 네 말랑한 입술과 닿았다가는 떨어졌다. 신호도 없는 키스였다. 자현아.
"……나도 오래 전에 너를 만났던 적이 있어."
오랜 미래에.




104????
기준치: | 104/52/20 |
굴림: | 4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 새끼도 참

기준치: | 104/52/20 |
굴림: | 5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걸 굳이 어.성을 하네)




눈치 챘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3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살던 미래로 돌아가. 과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홀연히 떠날 마음을 먹었어.
지금에서야 깨닫는 거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너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신기하지 않아? 내가 헤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나를 만나러 와줬다는 게.
더보기
그릇:이 새끼도 좀 이상한 듯
765 (GM):귀여워서 뽀뽀해줘야 됨
내가 다 빨아먹엇음
제가 다 빨아 먹어서 이자현은 이제 볼이 없습니다. 볼만 없는 줄 아시나요? 어깨도 없고 허벅지도 없고 옆구리도 없고 하여튼. ㅋㅋㅋㅋ 제가 정말 좋아하는 루프물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아포칼립스까지 다 더해진 시나리오였어요. 진행을 굉장히 오래 했었는데, 백업도 한참 지나서 하니까 약간 그거 같은. 내가 한 연성인데 내가 기억이 안 나서 너무 맛있는 느낌……. 사실 비모란이 저런 얘기를 했다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사실은 에필로그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어른이 된 자현모란과 어릴 때의 자현모란, 그리고 학생 이자현X3년후의 희생각 재는 비모란 이렇게 세 개를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이지 않았나 싶은…….
여하튼 둘은 다시 만나서도 사랑을 하겠죠. 그 점이 가장 맛있습니다. 그 비어버린 3년, 과거에서의 모든 시간, 그걸 비모란은 이겨내고 기다리고 감내하면서 이자현을 맞았어요. 다시 만난 둘에게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 지는 둘에게 달린 이야기겠죠. 꼭 행복해야 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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